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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선착장에서 중앙공원 가는 길

 

국립소록도병원 정문을 지나 홀로 타박타박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부터 소록도가 워낙 먼 탓에 시간도 늦은 데다, 비까지 내리니 날은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예쁜 사슴과 닮았다 하여 소록도라는 섬 이름과 달리, 섬은 음울하고 어두웠다. 아마도 섬이 안고 있는 무거운 역사 탓이려니.

 

섬의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계단을 오르고 나니 언덕의 정상에는 성당과 원불교당,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도를 보아하니 한센인들이 아닌 직원들을 위한 성전들 같았다. 고립된 공간에 3개의 종교라. 자연스레 군대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무교까지 포함해서 4개의 선택지만으로 종교의 자유가 지켜진다고 강조하던 그곳. 작위적으로 보이는 세 종단의 존재는 고립의 증거일 수도 있겠거니.

 

그래도 한때 열심히 다녔기 때문일까? 성당으로 발길이 갔다. 예전 직원들은 매주 이곳 성전에서 무엇을 위해 기도를 드렸을까? 자신에게 한센병이 옮지 않기를 기도드렸을까? 아님 나와 다른 그들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한센인들을 차별하는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해?

 

오랜만에 성당에서 기도를 드렸다. 과학적으로 한센병의 전염이 거의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록도에 들어서자마자 왠지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그리고 한센인에 대한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나를 위해 드리는 기도였다.

 

 

성당 뒤로 돌아가니 저 멀리 남해 다도해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보였다. 맑기는커녕 비까지 내리고 있는 날씨였지만 파란 바다에 섬들이 옹기종기 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오히려 아름다워서 더 슬픈 풍경이여.

 

원불교당 옆에는 신사가 있었다. 소설에도 등장했던, 일제강점기 때 제4대 수호원장이 한센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던 바로 그 신사였다. 예전에 허물어졌던 걸 다시 복원했는지 새 건축물 티가 났지만 음산한 분위기는 책에서 느낀 그대로였다.

 

신사를 지나 내리막길을 좀 더 내려가니 우체국 하나가 나타났다. 아마도 소록도 전체의 우편물을 관장하는 곳이리라. 비록 뭍에서 조금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심정적으로는 그 어느 곳보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소록도. 어쩌면 우체국은 고립된 소록도가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기능인지도 모른다. 결국 소록도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깥 세계와의 소통이기 때문이다.

 

우체국을 지나자 곧이어 하얀색의 소록도 제2안내소가 나왔고 그곳에는 '이제 앞으로는 환자거주지역이니 17시 이후로는 출입이 금지된다'라는 안내판이 붙여져 있었다. 왠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는 듯한 그 묘한 기분이란.

 

안내소 너머에는 수려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옆으로는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길가의 해송들은 저 너머로 뻗은 길을 울창하게 감싸고 있었다. 소록도만 아니었으면 분명 남해안의 다른 해변처럼 유명한 관광지로 개발되었을 이곳.

 

수탄장이었다. 한센병의 전염을 우려하던 그 시절, 병사지역에 격리되어 있던 부모들과 직원지대의 미감아 보육소에서 생활하고 있던 아이들이 한 달에 한 번 도로 양 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안녕을 확인했다는 바로 그 장소,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수탄장이었다.

 

이곳에서 부모를 바라보며, 혹은 자식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한센인들과 그의 자식들이 피눈물을 흘렸던가. 아마도 한센인들은 이와 같은 비극 앞에서 자신들이 짊어진 천형의 무게를 더욱더 절실히 느끼며 자학했을 것이다.

 

슬픈 역사 때문이었을까? 안내판을 보기 전 마냥 아름답다고 느꼈던 해변은 더 이상 수려해 보이지 않았다. 수탄장의 스산한 바닷바람 소리는 억울한 원혼들의 울음소리였으며, 우산 위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은 슬픈 원혼들의 눈물방울이었다.

 

어두운 해송 숲을 지나자 저 멀리 커다란 흰색 건물과 그 너머 작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립소록도병원과 한센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인 듯 했다. 비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날은 16시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두컴컴했다. 이제 더 이상 오는 사람도 없었고 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난 그렇게 홀로 소록도 중앙공원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소록도 중앙공원

 

국립소록도병원. 그 특수한 목적 때문인지 병원은 전체적으로 한산한 느낌이었고, 때문에 분위기는 더 스산했다. 건물 앞에는 추모비 하나가 서 있었는데, 읽어본 즉 해방 이후 자치권을 요구하던 한센인 협상 대표자 84명이 45년 8월 22일 억울하게 학살당한 것에 대한 기념비였다.

 

2002년에 그들이 죽고 57년이 지나서야 건립되어진 추모비. 그것은 결국 한센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의 징표였다.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한센인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문둥이'로서 멸시받아왔던가. 아직까지도 틈틈이 이어져 내려오는 그 사회적 편견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병원 옆의 마을은 한센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는 '외부인 통제구역' 간판이 서 있었다 한센병의 낮은 전염 가능성이나 치유방법 등이 모두 밝혀졌음에도 뭍으로 나가지 않는 이들이 그곳에 산다고 했다. 그들에게 무서운 것은 한센병이 아니라 뭍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주의 자유마저도 강하게 제어하고 마는 우리들의 편견.

 

통제구역 옆으로는 소록도 중앙공원이 시작되고 있었다. 궁극의 아름다움은 비극으로부터 잉태된다고 했던가. 1936년부터 3년 4개월 동안 6만 명이나 되는 한센이들의 맨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그 공원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묘사한 대로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얼마나 많은 한센인들이 강요되어진 그들의 천국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가.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다는 검시실과 감금실이었다. 검시실은 정관절제 수술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사망환자의 시체를 해부하는 건물이었으며, 감금실은 원장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환자 등을 감금하고 징벌하는 장소였다.
 
얼마나 많은 한센인들이 저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며, 또 종족번식이라는 고유의 본능마저 억압당했을까? 아마도 일제는 저 공간들을 통해 푸코가 이야기한 감시와 처벌, 생체권력 등 근대의 실험들을 자행했을 것이다.

 

비가 오고 어두워서 그런지 검시실은 더욱더 음산했다. 건물 한 구석에는 수술대와 단종대가 놓여 있었는데 특히 건물 벽에 전시되어 있는, 일제강점기 수호원장 때 지어졌다는 시가 그 당시의 비극을 생생히 증명하고 있었다.

 

단종대 - 이 동(李 東)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는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그 끔찍한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는 검시실에 비해 감금실은 비교적 평이했다. 이전에 봤던 서대문 형무소와 그 구조나 분위기가 비슷해서인지 독방들로 이루어진 감금실 건물은 오히려 친숙할 정도였다. 이 땅에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60~70년대까지 쓰인 건물이 워낙 많은 탓인가.

 

그러나 건물 구석구석 일제강점기 때 벌어진 인권유린에 대한 설명들을 보고 있자니 불편함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대문 형무소를 보면서 느꼈던 비슷한 감정으로서, 일제강점기 이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맥락으로 똑같은 만행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언급하지 않은 채 일제의 잔혹함만을 강조하는데 대한 불편함이었다. 너무도 낯간지럽고 가증스러운 우리 시대의 역사인식.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 운동가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꿈꾸었던 이들이 군사독재 정부에 의해 고문을 당했던 곳이며, 이곳 소록도의 감금실은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한센인들이 처벌을 당했던 곳이다.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를 모두 일제 탓으로 돌리지만 그것은 엄연히 최근까지도 우리들 손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며, 진정한 참회가 없는 이상 되풀이 될 수도 있는 역사이다. 세상이 아무리 많이 변한 것 같아도 한 순간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현재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지금은 우리가 한센인에게 행한 과거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자아비판 하지만, 그 역사가 망각되어진다면 언제 누가 나타나 다시 한센인들을 우리와 다른 타자로 규정할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1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의 기운이 가득한 독일에 나타나 유태인들을 공적으로 삼았듯이 한센인들을 타자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우리 사회는 파시즘의 기운이 높아져가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끊임없는 역사의 성찰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의무이다.

 

감금실을 나와 전시관으로 갔다. 그곳의 전시물들을 통해 한센병의 정체와 소설과 헷갈리는 섬의 역사 등을 알아보고자 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비록 끝날 시간은 아니었지만, 비도 오고 날도 어두워져오니 손님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담당자가 문을 잠그고 퇴근한 듯 했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고 담당자마저 퇴근하는 이 시공간에 과연 난 무엇을 위해 서 있는가. 

 

공원의 중앙으로 갔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관상수들과 함께 1963년 국제워크캠프 남녀 대학생 133명이 오마도 간척공사 근로봉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구라탑이 서 있었다. 이름 그대로 나병을 구한다는 의미의 구라탑.

 

그 밑단에는 사면을 돌아가며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는데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끝끝내 뭍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 된 오마도 간척공사를 마치고 돌아와 이 구절을 보았을 한센인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비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예수상과 녹산초등학교 등은 대충대충 둘러보아야 했고, 나는 그렇게 중앙공원을 나서야만 했다. 공원 내를 좀 더 천천히 걸으며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맑은 하늘에 다시 소록도를 찾아 전시관도 보고 공원도 좀 둘러보리라.

 

병원에서 선착장까지는 히치하이킹을 했다. 거센 비바람 때문인지, 아님 중앙공원에서 보았던 지난한 역사들 때문인지 선착장까지 가는 길은 걸어 들어올 때보다 오히려 먼 듯 느껴졌다.

 

다시 배를 타고 뭍으로 향한다. 저기 우리가 사는 곳이 보인다. 그곳은 한센인들이 알고 있는 '당신들의 천국'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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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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