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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사활동과 체험학습을 위해 거문도 어촌마을을 찾아온 한화석유 여수공장 직원과 가족들
봉사활동과 체험학습을 위해 거문도 어촌마을을 찾아온 한화석유 여수공장 직원과 가족들 ⓒ 오문수

한화석유화학 여수공장직원 및 가족 50명은 도농교류 정보화마을 캠프의 일환으로 9월 27일부터 28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거문도를 찾았다. 프로그램 중에는 역사·문화 프로그램, 낚시 및 자연해설 체험 프로그램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인간관계프로그램이 있었다.

어제까지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 걱정했던 일행들은 밤새 바람이 잦아든 해상 날씨에 안도하며 예정시각인 7시 20분까지 여수여객선터미널에 모였다. 미지 세계로의 탐험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학교와 학원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던 일상에 젖어 있던 아이들과 집에만 있던 주부들의 얼굴은 약간 들떠 있다. 

여수에서 거문도까지는 114.7㎞나 떨어져 있고 중간에 몇 개의 작은 섬에 기착하지만 쾌속여객선으로도 3시간이나 걸리는 뱃길이다. 거문도는 연안이 아닌 외해에 해당하며 더군다나 백도는 거문도에서도 40분간이 더 간다니 겁이 난 일행들은 멀미약을 사서 마셨다.

정확히 세 시간만에 도착해 민박집까지 가는 종선이 오기를 기다리며 바라본 거문도에는 제빙공장이며 다방 노래방 게임방 찜질방 등 웬만한 시설은 다 있다. 민박집이 있는 동도의 점심은 성찬이다. 때가 늦어서이기도 하지만 아침을 대충 때우고 출발했던 일행은 싱싱한 해산물과 푸짐한 시골 인심에 포식했다.

 파도가 심할 때는 바다와 바다사이의 바위들에 물이 넘는다는 의미의 무넹이와 고도와 서도를 잇는 삼호교가 멀리 보인다
파도가 심할 때는 바다와 바다사이의 바위들에 물이 넘는다는 의미의 무넹이와 고도와 서도를 잇는 삼호교가 멀리 보인다 ⓒ 오문수

거문도는 가장 큰 서도와 동도, 가운데에 고도가 있어 삼도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세 섬들이 방파제처럼 둘러쳐 있어 천혜의 양항을 이루고 있다. 멀리 동으로는 일본의 규슈 열도가 펼쳐 있고 서쪽에는 제주도, 북으로는 고흥 여수와 마주하고 있어 중국과 태평양으로 향하는 뱃길인 군사적 요충지이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열강들의 침탈대상이 되어 일본 영국 러시아 청국 미국까지 거문도를 넘보기도 했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우위를 보이던 영국은 러시아가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끼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했다.

1845년 영국 해군이 제주도 근해를 측량하던 중 이 섬을 발견하고 함장 포트 해밀턴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 항'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1885년 4월 14일 윌리엄 도드웰 제독이 3척의 군함을 보내 2년 동안 거문도를 점령했다. 소위 거문도 사건이다.

 영국군 묘지. 영국군이 철수하던 초기에는 9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2기만 남아있다
영국군 묘지. 영국군이 철수하던 초기에는 9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2기만 남아있다 ⓒ 오문수

고도의 항구에서 남동쪽으로 약 6백여 미터를 올라가면 우리 묘지와 완연히 다른 2기의 묘지가 보인다. 영국군이 철수하던 1887년에는 9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2기만 남아 있다.

영군이 철수하고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던 시절 거문도는 어업 전진기지이자 해군기지였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에는 3960척의 일본 어선이 조선근해에서 조업을 했다. 당시 주요 어종은 돔, 삼치, 정어리, 고등어가 잡혔다. 일제시절 거문도 주변에는 '고기가 석자 세치나 쌓여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고기가 풍부했다.

일제가 세토나이카이 연안의 어민을 메이지 중기에 거제도에 집단 이주시킨 것은 일본 해군의 전략이었다. 일본 해군은 가깝게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병참기지로 일본인의 집단촌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거문도로 이주한 사람들은 상점이나 목욕탕, 여관, 요정, 음식점, 카페, 유곽 등의 경영자가 됐다.

현재도 고도의 중심지를 돌아보면 일제의 가옥이 많이 보인다. 영국군 묘지로 가는 길에서 갈래길로 들어가니 눈에 익은 집 한 채가 보여 옆집 할머니에게 물어 보니 일제 때 일본 병원 원장집이란다.

 동도의 죽촌과 유촌의 해변가에는 7~8기의 일본군 방공호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있다. 바닥에는 물이 고여있다.
동도의 죽촌과 유촌의 해변가에는 7~8기의 일본군 방공호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있다. 바닥에는 물이 고여있다. ⓒ 오문수

동도의 죽촌과 유촌사이의 해변가에는 지금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 대비해 파놓은 7~8개의 방공호가 보인다. 직격탄을 피하기 위해 구부러지게 파인 호에는 물이 고여 있었지만 지금도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태평양전쟁 전 일본인이 살면 반드시 신사를 건립했다. 거문도의 경우 장소는 주위의 바다가 한눈에 다 보이는  높은 지대였다. 해방 후 조선 사람들에 의해 제일 먼저 파괴됐고 현재는 헬리콥터장으로 변모했으며 도리이는 절단되고 배의 밧줄을 묶는 말뚝으로 사용됐다.

점심을 먹고 일행은 곧바로 백도로 향했다. 백도는 전설이 두 개가 있다.

태초에 옥황상제 아들이 노여움을 받아 거문도로 귀양을 왔다. 그는 용왕의 딸과 눈이 맞아 바다에서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옥황상제는 수년 후 아들이 몹시 보고 싶어서 아들을 데리러 보냈으나 신하들마저 돌아오지 않았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아들과 신하들을 벌줘 돌로 변하게 했는데 크고 작은 섬이 백도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이다. 백도는 크고 작은 섬이 백개 정도여서 백도라 하였는데 세어보니 한개가 모자란  99개인 바 '일백 百'에서 '한 一'을 빼고, '힌 白'자인 백도(白島)라 부르게 됐다.

 아름다운 백도의 모습. 날씨 변화와 파도가 심해 운좋은 사람들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백도의 모습. 날씨 변화와 파도가 심해 운좋은 사람들만 볼 수 있다고 한다. ⓒ 오문수

그러나 백도는 실제로 39개의 크고 작은 바위들로 구성돼 있으며, 크게 상백도와 하백도로 구분돼 있다. 백도의 절경은 암석의 지질구조와 해식작용 및 풍화작용 등에 의해 이루어졌고, 특히 수직 절리 현상에 의해 병풍을 세워놓은 것과 같은 아름다운 장관이 연출됐다.

숙소로 돌아온 일행은 낚시체험을 위해 바다로 떠나고 이번 봉사캠프를 책임진 김기원 대리와 나는 삼도라 불렸던 섬을 거문도로 불리게 만든 장본인을 기려 세운 유촌리의 귤은(橘隱) 김유 선생의 사당을 찾았다.

영국 해군이 들어왔을 때 귤은 선생과 그들 사이에는 상당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고, 러시아 함대가 불법으로 입항했을 때도 김류 선생과 서도 장촌 출신의 김양록 선생이 러시아 함선에 올라 글씨를 써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 두 학자의 해박한 식견에 감탄한 나머지 클 '거(巨)'에 글 '문(文)'을 써 거문도라 부르게 됐다.

 동도의 죽촌에서 바라본 야경
동도의 죽촌에서 바라본 야경 ⓒ 오문수

저녁을 먹은 후 해변가에 모인 일행은 가족소개에 이어 간단한 장기 자랑을 하면서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시대의 요구일까 초등학생 어린이들은 간단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한다. 잔잔한 바다 위에 가로등 불빛이 비치며 아름다운 밤은 깊어가고 낮에 잡은 고기를 모닥불 위에 얹어 놓고 맥주를 곁들이는 웃음소리 속에 동료들에 대한 우정과 가족 사랑은 익어간다.

다음날 아침 6시 동도의 숙소를 떠난 남자들은 고도의 수협공판장에 와서 밤새 잡은 은갈치 하선작업에 나섰다. 갈치 하선작업은 이색체험이지만 봉사를 통해 지역민과 가까워지려는 작은 노력들이다. 밤새 불을 밝히고 외줄낚시로 잡은 배들의 성적은 신통찮다. 적게는 서너 상자에서 많게는 열 상자 정도이다. 상품 한 상자가 8~9만원이니 밤새 위험을 무릅쓰고 잡은 어부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 될지가 의심스럽다.

 아침 일찍 갈치 하선작업을 돕는 한화석유 여수공장 직원들
아침 일찍 갈치 하선작업을 돕는 한화석유 여수공장 직원들 ⓒ 오문수

8~9월이 제철인 채낚기 연근해어선의 하루 밤 사용유류는 2드럼 40만원이다. 만약 어황이 좋아 4백만원의 위판고를 올렸다면 선주가 기름값을 대며 50%를 갖고, 미끼와 개인장비를 부담한 6명의 선원들이 50%를 나눠 갖는다. 따라서 선원 일인당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약 20만원에 불과하다. 

어민들의 애로사항을 말해 달라는 요청에 수협유통과장 박일용씨의 말이다. "유가는 50% 상승했는데 어가는 되려 작년대비 20%나 하락했다. 강제상장제가 폐지되고 임의 상장제가 된 이후 직거래제도가 도입돼 노량진과 가락동 수산시장에서는 갈치를 올리지 말라고 한다. 즉, 유통질서가 파괴돼 양자가 서로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박씨는 "어민들을 위해 유류보조금을 확대하고 수산 장비를 저렴하게 보조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동도 죽촌리 뒷편 서낭당 주위의 소나무 고사목과 구름 모습
동도 죽촌리 뒷편 서낭당 주위의 소나무 고사목과 구름 모습 ⓒ 오문수

갈치 하선작업 봉사활동을 마친 일행은 아침 식사 후 김기원 대리의 숲 해설강의에 참가했다. 쑥은 아무리 거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쑥은 지혈이나 진통에도 좋고 여성들의 생리불순에도 좋다고 알려졌지만, 요즘은 비타민과 칼숨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위장에도 좋다고 소문이 났고, 거문도 쑥은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효험이 좋다고 하여 효자 종목이 됐다.

섬 곳곳에는 옥황상제와 선녀들이 먹었다는 천선과가 널려 있다. 천선과는 무화과와 과일이 비슷한데 꼭지의 끝에는 꿀물이 나오기도 한다. 김대리는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잠시 동안 바람과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고마움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눈을 감고 명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권했다.

 동양 최대의 거문도 등대
동양 최대의 거문도 등대 ⓒ 오문수

 거문도 등대 뒷편 절벽위에 핀 갯고들빼기의 모습. 뒷편은 2~3십미터의 절벽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보인다
거문도 등대 뒷편 절벽위에 핀 갯고들빼기의 모습. 뒷편은 2~3십미터의 절벽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보인다 ⓒ 오문수

수월산 끝자락에는 동양 최대의 프리즘렌즈를 자랑하는 거문도 등대가 있다. 이 거문도 등대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것으로 적색과 백색 섬광이 15초마다 교차한다. 빛이 비칠 수 있는 거리는 21마일, 광학적 38마일, 명목적 23마일로 1905년 4월 10일 처음 불을 밝힌 이래 지금도 세 사람의 등대지기가 지키고 있다.

하얗게 칠한 건물과 깨끗하게 단장된 우아한 건물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바람이 점점 심해지고 배가 출항이 가능할지가 걱정이 된 일행은 돌아갈 일이 걱정이다. 육지에 있으면 바람이 불든지 비가 오든지 상관없었는데 섬에 있으니까 걱정이다. 다행이 배가 운항한단다. 역시 사람은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봐야 처지가 이해되는가 보다. 사회 양극화 문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거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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