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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부 차관보이자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이 방북길에 오른다고 한다.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미해제와 북한의 영변 핵시설 불능화 중단 및 원상 복구로 역주행하고 있는 6자회담 구하기에 나선 것이다.

 

동시에 그의 방북엔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미국 차기 정부를 잇는 '다리놓기 외교'의 의미도 있다. 검증 갈등을 일단락짓고 2단계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6자회담은 미국 대선 이후에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장기간의 공전 내지 상황 악화는 불가피해진다. 북한과 미국 내부의 강경파들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온 그의 방북이 주목되는 까닭이다.

 

일단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하는 의지는 힐 차관보의 방북 성사를 통해 확인된다. 부시 행정부로서는 힐의 방북이 아무런 성과도 가져오지 못하면 거의 유일한 외교적 업적마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평양 방문길에 오를 힐의 손에는 검증 문제와 관련해 절충안이 쥐어져 있을 것이다.

 

불능화 중단 의사를 미국에 통보한 8월 14일 이후 강경책으로 일관해 온 북한 역시 힐의 방북을 수용했다는 것 자체가 협상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는 와병설이 나돌았던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회복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가 통치 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힐의 방북을 수용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힐의 방북 때 김 위원장의 결단이 주목되는 이유이다.

 

NYT, 미국 검증안은 "패전국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워싱턴에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지난주 입수해 공개한 미국 측의 검증 계획서는 플루토늄뿐만 아니라 북한이 실체를 부인해온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및 핵확산 내용까지 검증할 수 있는 광범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미국 주도의 사찰단이 북한의 모든 핵 시설과 지역을 샅샅이 뒤질 수 있고, 관련자들을 무제한으로 면접하며, 시료 채취, 사진 및 비디오 촬영 등 필요한 모든 기술적 수단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북한에게 '백지수표'를 달라는 것으로, 북한이 '가택수색'이라고 부르면서 강력히 반발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문서를 분석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원을 지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미국의 검증안을 "스파이 허가장(a license to spy)"이라고 불렀다. <뉴욕타임즈>는 29일 사설에서 "패전국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며, 비현실적인 검증안을 제시한 부시 행정부가 오늘날의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뉴욕타임즈>의 정책 권고는 정곡을 찌른다. 이 신문은 딕 체니 부통령 등 강경파의 농간으로 또 다시 북핵 협상이 위기를 직면했다며,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두 가지를 주문했다. 하나는 "강경파들로부터 대북정책을 구해 더 현실적인 검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하루 속히 북한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삭제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북한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다시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북한도 유연한 자세 보여야

 

이처럼 순항하던 6자회담이 좌초할 위기에 처한 1차적인 책임은 부시 행정부에게 있다. 그리고 북한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경책을 들고 나오자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서고 있다. 미국 스스로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자초하고 이에 또 다시 양보하는 모양새를 취할 공산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삭제하고 현실적인 검증 방안을 협의하는 것은 결코 북한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9·19 공동성명과 10·3 합의, 그리고 지난 7월 6자회담 수석대표 회의 결과를 무시한 과오를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의 핵심적인 과제는 테러지원국 해제와 함께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길고 험난한 과정이 될 검증의 초석을 놓는 것이다. 즉, 검증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비현실적인 욕심을 버리고 비핵화 및 상응조치 이행의 단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뤄나갈 수 있는 검증 방안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부시 행정부 임기 내의 마지막 협상이 될 이번 힐의 방북 때, 북한 역시 유연하고 협력적인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유연한 자세로는 크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한반도 비핵화 단계에 따라 검증을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우선 '낮은 단계의 검증' 협상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둘째는 비핵화 최종단계에서는 '국제적 기준'을 비롯한 '높은 단계의 검증'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원상복구에 들어간 핵시설을 다시 불능화하는 데 '테러지원국 해제' 이외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태그:#6자회담, #힐 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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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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