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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길

수 년전 절찬리 방영됐던 역사 드라마의 제목이 '불멸의 이순신'이었다. 사사건건 시비 걸기를 좋아하는 네티즌들마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만큼 이순신 장군이 우리 국민으로부터 받는 존경심은 대단하다. 반면 고려말 무장으로서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고 숱한 전장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등 이순신과 비교해 조금도 꿀릴 것 없는 공을 세운 이성계에 대해서는 '위대한'이나 '불멸의' 같은 수식어가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순신은 명예로운 군인이었지만, 이성계는 결코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군인은 단연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 외적의 침입을 사전에 막기 위해 필요하고, 적의 침략이 있을 때 기꺼이 맞서 싸우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평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 위해 존재한다. 이순신이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아무도 전쟁에 대비하지 않고 있을 때,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비를 확충해 전쟁에 대비했고, 외적이 침입하자 나가 싸워 이겼고, 끝내 장렬하게 산화한 까닭이었다.

이성계는 어떤가? 그 역시 대단한 무용을 지닌 무장이었지만 그는 조정의 명이 자신의 뜻과 다르다 하여 사사로이 회군하였고, 자신을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가 세운 왕조가 무려 500년간 지속되었음에도 역사는 그를 결코 명예로운 군인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4불가론'을 주장하며 자신의 위화도 회군을 정당화시키려 했지만 역사는 이 또한 용인하지 않았다.

만약 그 상황에서 이순신이라면 어떠했을까? 다행하게도 답이 있다. 잇단 승전보를 보냈음에도 조정이 자신을 파직시키고, 백의종군을 명령하자 부당한 영에 불만을 표하지 않고 승복했다. 원균이 전사하고 대부분의 전력이 와해된 상황에서 초라하게 복직되었을 때도 그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신에게는 아직도 13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며 어느 자리에 있거나 오로지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만 처신했다.

1961년과 1980년, 닮은 꼴의 봄

'61년의 봄이 종신집권을 꿈꾸던 이승만의 10년 독재를 시민의 힘으로 종식시키고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초석을 다지던 시기였다고 한다면, '80년의 봄은 똑 같이 종신집권을 꿈꾸며 18년을 집권한 박정희의 사망이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닮았고, 많은 희생과 피와 눈물을 댓가로 얻은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린 좌절을 겪었다는 점에서 또 닮았으며, 그 희망을 앗아간 주구가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굳건하게 지켜줬어야할 군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또 닮았다.

그렇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서 군(軍)은 이 땅의 민주발전을 결정적으로 좌절시킨 당사자라는 수치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책임은 이 땅의 모든 군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국가가 부여한 힘을 사사로이 사용한 정치군인들에게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이들 정치군인은 고개를 숙였고, 선배들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우리 국민은 이 다짐을 믿었고 군이 변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군인의 정신을 갉아 먹는 정치 군인들은 바람이 부는 동안 고개를 숙인채, 다시 정치군인들이 활개치는 무인정권시대의 회기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이른바 '혁명공약'이란 것을 통해 국민 앞에 철석같이 속했다.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고,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라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해 끌어들인 다른 동료들까지 '반혁명분자'로 몰아 처단하며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낯이 뜨거웠는지 자신을 '불행한 군인' 이라고 했고 "더 이상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어야 한다"고 낯 간지러운 푸념도 했다. 그런데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두 차례의 임기를 마친 그는 "딱 한번만 더.."라며 헌법을 뜯어 고쳤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정권을 상대로 유신이란 이름의 쿠데타를 단행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유신헌법은 한 나라를 지탱하기 위한 법적 인프라가 아니라, 오로지 한 사람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수단으로만 작용했다. 대통령은 맘만 먹으면 국회를 해산할 수 있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할 수 있었으며, 언론을 사전검열하고 통제할 수 있었고, 영장 없이도 국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있었다.

9사단 29연대는 철책경비부대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예비연대였고, 15전차대대는 유사시 최전방에 배치된 기갑부대였다. 신군부는 정권 탈취를 위해 이 병력마저 이동시켰다.
▲ 12.12 당시 병력이동상황 9사단 29연대는 철책경비부대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예비연대였고, 15전차대대는 유사시 최전방에 배치된 기갑부대였다. 신군부는 정권 탈취를 위해 이 병력마저 이동시켰다.
ⓒ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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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의 신군부가 한 일을 살펴보자. 그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하극상을 저지르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대통령 유고'로 야기된 안보의 비상 사태에서 철책을 지켜야할 전방 병력조차 빼돌리는 반 국가적 행위를 서슴치 않았는가 하면,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중을 탄압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금성 교과서에 박정희가 "헌법 위에 존재한 대통령"이라고 실린 내용이 과연 얼마나 사실과 다른가?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동원한 강압정치"를 했다고 기술한 것 또한 어떤 편견도 가미하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기술이었다. 1947년부터 1953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6년간 지옥도를 연출한 4.3사건이 "1947년 3.1절 기념식장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하면서 촉발되었다"는 기술 또한 한점 거짓없는 역사의 사실이다.

자 이제 당신들 정치군인에게 삼척동자도 알만한 질문을 던져 보자. 유신독재 당시 대통령 위에 헌법이 있었는가? 아니면 헌법 위에 대통령이 있었는가? 또한 12.12 당시 전방을 지켜야 할 부대를 이동시켜 안보 공백을 초래한 자와 민주주의를 요구한 국민 중 누가 더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했는가? 당신들의 눈에 이순신과 이성계 중 누가 더 훌륭한 군인인가?

진정 명예로운 군인은 어떤 경우에도 주인을 상대로 칼 끝을 겨누지 않는다. 오로지 주인을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는 길을 걷는자 만이 명예로운 군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와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국방부, #정치군인, #박정희, #전두환,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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