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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본 들녘의 나락. 예전에 허수아비나 깡통줄이 주렁주랑 매달려 있었다.
 흑백으로 본 들녘의 나락. 예전에 허수아비나 깡통줄이 주렁주랑 매달려 있었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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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익어갑니다. 들녘을 비추는 가을빛은 풍성함을 가져다줍니다. 작은 태양빛 사과들이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리고, 조롱박은 주저리주저리 허공에 매달려 춤을 춥니다. 대추나무에 와글와글 달린 대추들도 오동통한 볼에 색조화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을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과.
 가을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과.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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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으로 시선을 돌리면 푸른 옷을 입었던 나락들이 노란 옷으로 갈아입을 준비에 한창입니다. 그 들길을 걸어봤습니다. 어린 아들 녀석도 함께 했습니다. 나락 몇 알을 따서 입에 물었습니다. 이로 껍질을 벗겨 알맹이는 먹고 껍데기는 톡 뱉어 멀리 보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아들 녀석이 나락을 왜 먹느냐고 반문합니다.

어린 시절, 나락은 장난감이고 요깃거리였습니다. 3km 남짓 되는 학교(초등학교)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우리가 걷는 등하굣길은 늘 논길이었습니다. 방학 때나 큰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곤 논길을 따라 학교와 집을 오가며 놀았습니다.

주렁주렁 땅을 굽어보는 박
 주렁주렁 땅을 굽어보는 박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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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들이 서걱대는 논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바짓가랑은 이슬에 젖습니다. 논흙도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에 젖건 흙이 묻건 우리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장난을 치며 논길을 뛰고 걸었습니다. 미끄러져 옷이 흙범벅이 되면 도랑물로 쓱쓱 닦아내고 학교에 가고 집에 왔습니다.

논길 따라 가다 만난 녹두꽃. 아침 이슬에 젖어 맑게 피어 있는 모습이 새롭다
 논길 따라 가다 만난 녹두꽃. 아침 이슬에 젖어 맑게 피어 있는 모습이 새롭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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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입이 심심하면 나락모가지를 하나 툭 잘라서 한 알 한 알 따서 까먹습니다. 어른들처럼 낱알 한 알을 입에 물고 잘 여물었는지 안 여물었는지 품평도 하면서 오물오물 씹다가 껍질만 툭 뱉어냅니다. 가끔 껍질이 목에 걸려 닭 뼈 먹은 개처럼 켁켁거리기도 하지만 나락 까먹는 맛도 솔찬히 재미납니다.

아들 녀석도 아빠를 따라 나락 낱알을 입에 뭅니다. 잠시 오물거리더니 '에이! 이게 뭐야?' 하면서 '퉤퉤' 침까지 튀기며 뱉어버립니다.

'왜, 맛 없냐?'고 했더니 '그럼 아빠는 이게 맛있어?'하는 생뚱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온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애. 입에서 뭔가 쓰르륵 대는 것 같아."

가을의 뜨거운 빛을 받아 토실토실 여물어 가는 낱알들
 가을의 뜨거운 빛을 받아 토실토실 여물어 가는 낱알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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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르륵 댄다는 아들 녀석의 말에 웃음이 납니다. 어린 아들은 ‘쓰르륵’ 댄다고 나름대로 표현했지만 사실 까칠한 나락 껍질을 이빨로 벗길 때 부딪치는 소리가 온 몸에 싸늘한 소름 같은 것을 전달해줍니다. 무슨 유리나 사기 같은 것을 질근 씹을 때처럼 말입니다.

후여~ 훠워이~ 새 보는 소리, 지금은 들리지 않지만

들녘 어디선가 ‘후여~ 후여~ 훠워이~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딜까 하고 돌아보지만 사람은 보아지 않습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소리입니다.

예전엔 들에 나가 새 보기 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학교 갔다 오면 기다란 나무나 간짓대에 비닐을 달거나 깡통을 들고 논으로 향했습니다. 막 익어가는 나락들의 알맹이를 빨아먹고 쏘아먹는 새들을 쫓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참새가 많지 않지만 옛날엔 참 많았습니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그물을 치고 논두렁 따라 깡통을 빙 둘러놓아도 참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랗게 익어가는 나락에 앉았습니다. 수십에서 수백 마리가 휩쓸고 간 자리엔 흰 쭉정이만이 농부의 마음을 쓸고 갔습니다.

우연히 만난 허수아비.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우연히 만난 허수아비.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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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서 우여 하면
저 논으로 후르르륵
저 논에서 우여 하면
이 논으로 후르르륵
논두렁에 새지기는
종일토록 애만 타고
후룩 후룩 참새들은
날적마다 살이 찐다.

예산 지역에서 전해내려 오는 ‘새 보기’라는 전래동요입니다. 새를 쫓는 풍경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를 쫓기 위해 새를 보는 풍경은 보이지 않습니다. 새 보기뿐만 아니라 허수아비도 보기가 힘듭니다. 새들도 많지 않지만 농촌에 사람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예전엔 집집마다 아이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했지만 지금은 한 마을에 한두 집 정도입니다. 대부분 노인들뿐인 농촌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우고 새를 쫓기 위해 깡통을 때리고 흔들어댄다는 것은 이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가을 들녘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봄부터 여름까지 흘렸던 농부들의 땀방울입니다. 농부들은 나락들이 쓰러지지 않고 건강하고 튼실한 열매로 서있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확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후여~ 훠워이~’하는 소리는 이젠 추억 속에 묻혔지만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은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논길을 따라 등교하다 보면 바짓가랑이는 어느 새 이슬에 촉촉히 젖어 있게 되고, 하교 할 땐 저 나락들이 주전부리가 되기도 했다.
 논길을 따라 등교하다 보면 바짓가랑이는 어느 새 이슬에 촉촉히 젖어 있게 되고, 하교 할 땐 저 나락들이 주전부리가 되기도 했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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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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