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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마의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 위에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언덕 주변의 눈이 밟히는 곳에는 모두 고대 로마의 유적이 있었다. 이 언덕에서는 콜로세움(Colosseum)도 내려다 보였다. 콜로세움이 들어선 자리도 원래는 네로(Nero) 황제의 별장 지역인 도무스 아우레아의 인공호수가 있던 곳이다.

도무스 아우레아의 유적은 철망으로 보호되고 있었고 그 주변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무너진 붉은 벽돌 건물 사이의 공원길을 걸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공원 안을 산책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입장하기 위해 끝도 없이 줄을 서는 로마에서 도무스 아우레아는 한가하게 산책할 수 있는 곳이었다.

네로 황제가 로마의 대화재 후에 건설한 궁전이다.
▲ 도무스 아우레아 네로 황제가 로마의 대화재 후에 건설한 궁전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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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궁전'이라는 뜻의 도무스 아우레아는 서기 64년~68년에 네로 황제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건설이 시작된 서기 64년은 로마시내에 대화재가 일어났던 해였고, 네로 황제는 대화재가 지나간 자리에 도무스 아우레아를 건설한 것이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화재 후 드넓은 도무스 아우레아를 짓고 개인 재산처럼 이용하는 네로에게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내 머릿속에는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희열에 젖어있던 영화 <쿼바디스>의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당시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를 일으킨 주범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화재의 주범으로 기독교도들을 지목하고 이들을 학살하게 된다.

많은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해서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를 일으키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수십 년 전의 할리우드 영화는 대화재 당시 불타는 로마를 보며 노래를 부르는 네로의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강력하게 심어 버렸다.

나는 공원의 한 계단에 앉았다. 로마의 여름 아침 햇살은 따갑지만 계단이 있는 그늘은 정말 거짓말같이 시원했다. 내 눈 속으로 콜로세움이 들어오고 그 뒤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가 얼핏 보였다.

당시의 황금궁전은 포로 로마노가 있는 팔라티노(Palatino) 언덕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팔라티노 언덕에서 첼리오 언덕 아래의 저지대를 지나 에스퀼리네(Esquiline) 언덕에 이르는 광대한 도심부에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궁전 건물은 호수를 바라보는 오피아누스 언덕 비탈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당시 도무스 아우레아의 면적은 콜로세움의 25배 정도나 되었고 로마 시내 한 중앙에 있어서 시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궁전 주변을 크게 우회하는 불편을 겪을 정도였다.

이 공원에도 한국 배낭 여행자들이 있었다. 약간은 무거운 DSLR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한국 여대생들이 보기가 좋았다. DSLR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는 것은 자기가 찍는 사진을 한번쯤은 머릿속에서 생각해보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하는 가족 사진을 동포 배낭족 여대생 손에 맡겼다.

옛 궁전 유적에서 한가하게 산책을 할 수 있다.
▲ 도무스 아우레아 공원 옛 궁전 유적에서 한가하게 산책을 할 수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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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덕의 더 높은 쪽으로 걸었다. 이 언덕에는 티투스(Titus) 목욕장과 트라야누스(Trajanus) 목욕장의 유적이 남아 있고, 그 아래에 도무스 아우레아의 유적이 있었다. 이 도무스 아우레아 유적은 로마가 멸망하고도 세월이 한참 흐른 15세기 말에 발굴된 유적이다.

안타깝게도 궁전의 옛 모습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네로 황제가 궁전을 지으면서 시민들의 사유지를 무단으로 몰수하였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네로 이후의 황제들이 궁전 건물 자리에 거대한 공중 목욕장을 지어 시민들에게 기증한 것이다.

폭군 네로와 자신이 다르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네로의 흔적을 지운 것이다. 네로도 그 화려했던 궁전을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였고, 후일의 여행자들도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옛 궁전의 실내공간은 버려진 동굴 같은 모습이었다. 이 안에 벽화와 실내장식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데, 이 실내장식 양식은 16세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기둥이나 벽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데에 모방되었다. 궁전 내부의 그로토(Grotto, 동굴) 같은 유적에 남은 벽화와 회반죽 장식은 라파엘로(Raffaello)와 그 제자들에 의해 그로테스크 풍 미술로 발전되었다.

무너진 유적의 곳곳에 남은 섬세한 프레스코 벽화가 네로의 예술적 취향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그는 독재자였지만 건축 속의 아름다운 미술을 음미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유적지에 화려하게 남은 장식물들이 아니었다. 공원 입구에서 보잘 것 없이 허물어져 가는 아주 조그마한 벽돌 건물이었다. 2천 년 전 유적의 벽돌 하나라도 행여 무너질까봐 고이 보존하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다. 로마의 빛나는 다른 유적에 비해 정말 하찮아 보이는 무너진 건물 더미지만 이들은 작은 유적 하나하나에도 온갖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많은 건물이 허물어져서 궁전 터는 황량하기만 하다. 당시 궁전은 도시 한복판에서 전원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대규모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지금도 많은 나무가 들어찬 공원의 모습이 평화스럽기만 하다.

도무스 아우레아의 언덕에 펼쳐져 있었다는 로마제국 당시의 현관, 정원, 분수대, 호수가 현재 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웅장한 기둥의 복도가 현관을 이루고 찬란하게 도금된 높이 35m의 네로 황제 동상을 상상해 보았다.

네로는 이 거대한 도무스 아우레아를 건설하면서 국가재정을 낭비했고, 국가재정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통화 개혁까지 단행할 정도였다. 네로 황제는 궁전의 건설 이후 계속 파행적인 행동들을 일삼으면서 로마제국을 혼란에 빠트렸다.

나는 화려함이 사라진 공원에서 한가하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네로황제 사망 이후 콜로세움 옆의 공원으로만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도무스 아우레아의 흔적들을 보고 싶었다. 나는 궁전 건물은 사라졌지만 당시 넓은 궁전 안을 장식하던 유물들은 로마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무스 아우레아에서 발굴된 로마 황제의 욕조
▲ 보라색 욕조 도무스 아우레아에서 발굴된 로마 황제의 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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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네로의 유물들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다음날 바티칸 박물관을 관람하고 있었다. 나는 바티칸 박물관 안의 원형 전시실(Sala Rotonda)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 전시실은 로마 시대의 유명 조각상들이 대형 대리석 유물을 호위하듯이 감싸고 있었다. 그 순간 한국인 가이드가 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눈앞의 원형 대리석이 네로 황제가 사용했던 욕조라는 것이었다. 이 대리석 욕조는 네로 황제가 건설한 도무스 아우레아의 폐허에서 발굴한 것이었다.

이 대리석 욕조에 네로 황제의 것이라는 명문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존재했던 네로의 궁전에서 발굴된 유물이고, 유물의 색상이 황제만이 사용하던 보라색이기 때문에 네로의 욕조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보라색의 긴 막대 대리석 한 통을 이용하여 욕조를 깔끔하게 만들어 버리는 권력은 황제 아니면 갖추기 힘든 것이었다.

네로 황제의 거대한 최고급 대리석 욕조는 보라색 광택이 나고 있었고, 마치 최근에 만들어진 것처럼 깨끗했다. 보라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고급 색상이었고, 보라색 욕조는 황제가 소유한 하나의 예술품이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보라색 대리석은 서양에서도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많은 황제들의 관이 이 보라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타원형 대리석 욕조 아래를 자세히 보니 사자 4마리가 있었다. 사자 머리가 욕조를 받치고 있고 머리와 바로 연결된 사자의 발이 굳건히 사자를 지탱하고 있었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 사자의 발가락과 발톱은 사납게 드러나 있었다. 로마인들은 아프리카 영토에서 볼 수 있는 백수의 왕을 황제의 목욕실에 들여놓고 있었다.

타일의 바닥이 깊어 오늘날까지 화려하게 보존되어 있다.
▲ 욕장의 모자이크 바닥 타일의 바닥이 깊어 오늘날까지 화려하게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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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 욕조 아래에는 지금 사용해도 이상이 없을 듯한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이 깔려있다.
이 모자이크 타일은 로마 시에서 약 40km 거리에 위치한 오트리콜리(Otricoli) 목욕장 유적에서 발견된 큰 모자이크이다.

이 바닥 타일은 깊이가 매우 깊다고 하는데 타일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바닥까지 깊게 연결되는 모자이크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무스 아우레아에서 거둬 온 바닥 타일은 아니지만 도무스 아우레아의 황제 욕실에는 아마도 더 아름답고 화려한 바닥 타일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네로 황제의 욕조도 보라색 대리석이요, 바닥의 모자이크도 온통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어느 건축자재보다도 튼튼하고 반영구적인 석재가 당시 네로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에서 화려한 예술품들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탈리아에 수백 가지 이상의 다양한 색상을 가진 대리석 광산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네로 황제가 벌거벗은 몸으로 욕조 안에서 생각에 잠긴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대리석 욕조에 채워진 물은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폭군이면서도 예술에 조예를 지녔던 젊은 그가 따뜻한 물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목욕하던 욕조 주변으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매일 수만 명씩 몰려드는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 이 여행기는 2008년 7월 20일~21일의 여행 기록입니다.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로마, #도무스 아우레아, #바티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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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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