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찰 일 많이 해 보셨지예?"

"쬐끔. 근데 그건 왜에?"

"부산에 큰 사찰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글 쓰는 사람을 구하고 있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이 선생님이 딱이다 싶어 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빨리 모시고 오라 했다 아입니꺼. 월급도 꽤 세던데."

"그래요? 그것 참 잘 됐군요. 내가 아마 전생이 중이었던가 봐. 절밥을 또 먹는 걸 보면."

 

2002년 4월 초, 부산에서 출판기획사를 꾸리고 있던 친구한테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부산에 있는 사찰의 스님도 이미 나를 점 찍어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너스는 없어도 월급은 지방 일간지 부장급보다 조금 더 셌다. 4월 중순, 그 절에 처음 간 날 스님이 "첨 만날 때는 다 좋은데 헤어질 때가 문제더라구"라는 말을 했다. 나는 스님에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절에서 신도들의 수기를 문장에 맞게 고쳐주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내 방이 따로 있어 일하기에 아주 편했다. 아무도 내게 안티를 걸지 않았다. 안정을 되찾은 나는 그 때부터 <오마이뉴스>에 매일 기사 한 꼭지를 올리기 시작했다. 기사를 쓰는 것이 내 중심을 잡는 일이자 다른 사람들과의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월급을 꼬박꼬박 통장으로 보내주자 가정도 점점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걱정이 없었다. 서울에서 짊어지고 온 급한 빚도 아내가 조금씩 갚아나갔다. 스님이나 종무소에서도 나를 늘 손님 반기듯 깍듯하게 대했다. 이제는 더 이상 직장 때문에 발버둥치는 일이나 크게 어려운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사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매일 쓰면서 여러 가지 상을 탈 수 있었던 것도 생활의 안정이 가져다 준 큰 선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시도 차분하게 쓰고 다듬기 시작했다. 오래 접어두었던 서울 문우들과의 만남도 자주 가졌고, 행사에도 부지런히 다녔다.

 

2005년 4월. 그 때는 스님에게 허락을 얻어 집에서 편안하게 신도들의 원고 다듬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종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 좀 급히 보자는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의아해 하며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 종무소 간부를 만났다. 종무소 간부는 대뜸 저녁이나 먹으며 이야기하자며 나를 식당으로 이끌었다. 

 

"술 한 잔 하시지예?"

"좋지요. 근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 정말 죄송하게 됐심니더. 스님께서 요즈음 절 재정이 어려워 당분간 신도들 글 다듬는 작업을 중단했으면 좋겠다고 전하랍니더.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일을 중단시키려면 3개월 전에 미리 알려줬어야지,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스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끝까지 같이 일을 하자고 하셨는데…."

 

순천에서 인터넷 종합일간지를 창간시키다

 

캄캄했다. 평생직장이라 여겼던 일이 갑자기 3년만에 끝이 나자 가정에 또 다시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선 받은 퇴직금으로 버티면서 그 사이에 얼른 다른 직장을 잡으려 했다. 그때 인연을 맺게 된 회사가 서울에서 인터넷 종합일간지와 주간지를 펴내고 있던 00신문사였다.    

 

이 신문사에서 지역본부를 운영하는 기자 말로는 회사에서 일정한 운영비와 활동비를 준다고 했다. 2006년 봄, 나는 사무실을 어렵게 얻어 이 신문 지역본부를 맡았다. 근데, 매주 주간지 200부가 내려오는 것이 모두였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신문에 기사를 쓰는 틈틈이 여러 가지 원고 집필을 대행해주면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갔다.

 

2007년 봄. 그 신문사마저 문을 닫자 나는 순천으로 날아갔다. 순천에서 그해 봄부터 인터넷 종합일간지를 하나 만들자는 제안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해 5월부터 나는 그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아 순천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며 인터넷 종합일간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월급이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해 7월, 마침내 순천에서 인터넷 종합일간지를 창간했다. 주위 사람들과 공공기관·기업체들의 반응과 평가도 좋았다. 취재기자만 몇 명 더 채용하고, 시민기자들을 더 많이 늘리면 금세 자리를 잡을 것만 같았다. 문제는 재정을 움켜쥐고 있는 오너였다. 오너는 처음 2년 동안 인터넷신문을 운영할 자금을 미리 내놓겠다고 했다.

 

2년 동안은 인터넷신문을 자율적으로 꾸려보라는 것이었다. 근데, 날이 갈수록 말이 자꾸만 뒤바뀌었다. 게다가 월급도 정해진 날짜를 지키지 않고 들쭉날쭉 제 멋대로 나왔다. 매주 오너가 직접 참가한 기획운영회의에서 스스로 결정한 내용도 그대로 지켜지는 때가 한 번도 없었다.

 

직장따라 10여 년만에 다시 서울로

 

"선배님! 요즈음 새로 맡은 신문사는 잘 굴러갑니까?"

"자네가 말이야~ 서울에 올라와서 날 좀 도와주면 참 좋겠는데, 월급이 적어서 말이야."

"어차피 정치의 계절이니까, 저도 서울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배님 신문에는 제가 프리랜서로 뛰면서 기사를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2007년 8월. 서울에서 00주간지 사장을 맡고 있던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렇잖아도 대선·총선을 앞두고 있어 누군가 서울로 파견시키려 했다. 하지만 서울에 올려보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직접 서울에서 뛰기로 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별도의 지원비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선배가 사장으로 있는 주간지에 매주 기사 3~4꼭지를 써주는 조건으로 원고료를 받아 생활비에 보태기로 했다. 근데, 주간지 오너가 나에게 자기 신문사에 올인하라고 통사정을 했다. 나는 조건을 달았다. 내가 편집국장으로 있는 신문사와 자매결연을 맺어 기사를 서로 공유하자고 했다.  

 

근데, 그 사실을 순천에 있는 오너가 곡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순천에 있는 신문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주간지가 꾸리고 있었던 인터넷신문 편집국장을 맡았다. 종이 주간지에 정치 해설기사(40매) 2꼭지를 매주 쓰는 조건을 달고.

 

그 때부터 나는 2평짜리 원룸에서 생활하면서 기존 인터넷신문의 디자인과 형식을 180도로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주간지 정치 기사와 인터넷신문을 한꺼번에 밀고 나가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근데, 어느 날부터 오너는 격주간지까지 책임지라고 했다. 그때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 마감하고 나면 또 하나 마감해야 했다.

 

월급도 쥐꼬리만 했다. 원룸 방세에 여러 가지 세금을 떼고 나면 12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툭 하면 여러 회의에도 참석해야 했다. 게다가 회사가 어렵다며 월급을 감봉하자는 둥, 편집국장이 광고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둥, 별의별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이비 기자의 길로 그대로 빠지고 말 것만 같았다.

 

나는 오늘도 이런 직장을 꿈꾼다

 

 

2008년 2월 초. 엄청나게 추웠던 그날 아침, 나는 그 회사에 사표를 냈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했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나 혼자 먹고 사는 것이야 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고등학교에 다니는 예쁜 두 딸과 나만 바라보고 사는 아내는 어찌하겠는가.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뇌까리고 있는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그럭저럭 직장을 여럿 옮겨다닐 수 있었다. 월급이 좀 적어서 탈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금은 정말 막막하기만 하다. 앞으로 5년이 더 흐르고 나면 내 나이 이미 54살에 접어들게 된다. 그때까지 이런 날들이 계속될 것을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나는 요즈음 출판사 기획·교열을 하는 일과 불교경전을 해제해 주는 일을 맡아 어렵게 어렵게 버텨나가고 있다. 앞으로 내 앞에 또 어떤 직장이 또 어떤 아픔과 또 어떤 기쁨을 줄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10여 년 동안 10번 이상 직장을 옮겨다녀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일이란 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어렵고 힘에 부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이젠 벗어날 수도 없다. 이미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 어찌 다른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도 이런 직장을 꿈꾼다. 월급이 적으면 이름이라도 빛나는 정론지, 내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올곧은 언론사에서 일하기를 꿈꾼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좌충우돌 구직기'


#나의 10년#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