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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수

몸은 불쾌, 하지만 마음만은 상쾌했던 출발


7월 29일, 아침 6시 기상. 살갗이 튼 얼굴을 물티슈로 조심스럽게 문지른 뒤 밖으로 나갔다. 습기 찬 날씨 탓에 널어둔 등산화와 스패츠(바지가 진흙에 젖지 않도록 무릎 아랫단에 착용하는 덮개)는 여전히 축축했다. 르웬조리에 오른 이후로 씻는 데 물 한 컵 써보지도 못했는데, 진흙투성이 장비를 그대로 사용하려니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 산장의 경치는 마음만큼은 상쾌하게 만들었다. 산장 오른편으로는 마르게리타 봉 정상의 하얀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날의 자욱한 안개를 모두 걷어 버리고, 파란 하늘 아래 드러난 마르게리타는 깨끗함 그 자체였다.   

출발하기 직전, 오지탐사대원은 이번에도 산장 앞에 동그랗게 서서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아프리카의 "아"를 선창하는 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의 구호가 우리보다 먼저 마르게리타 정상에 닿길 바라면서.

"아! 프리카! 우! 간다! 마! 가르타!
하쿠나! 마타타!
아프리카! 어이! 아프리카! 어이!
아프리카~! 어이,어이,어이!"

이렇게 작은 발대식은 가이드와 포터, 그리고 산장에 있던 외국인들과 함께 마무리됐다. 가이드와 포터들은, 우리 모습이 재밌었는지 구호를 따라 부르며 장난을 쳤다. '아프리카'가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시끌벅적한 와중에, 대원들은 르웬조리에서의 세 번째 산행을 시작했다.

진흙길로 이루어진 '비의 언덕'을 오르다

2km의 나무다리.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아래를 주시해야 했다.
 2km의 나무다리.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아래를 주시해야 했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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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웬조리는 여러 가지 별칭을 가지고 있다. 비의 언덕(Hill of Rain)이라고도 하고, 레인메이커(Rainmaker)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르웬조리의 날씨는 일관된다. 1년 중 3분의 2는 비가 내리는 만큼, 대원들이 산행할 때도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았다. 방문 시기가 '건기(6~8월)'였는 데도 말이다.

설명을 대변하듯, 이날부터 대원들은 비를 맞았다. 산이어서 그런지 하늘의 상태는 오전과 오후의 차이가 심한 편이었다. 아침에 꽤 맑았던 하늘은 어느새 안개가 두텁게 끼어 우중충했고, 하늘에서는 가랑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래도 르웬조리에서 내리는 비는 대체로 약했기 때문에, 비를 맞는 것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를 맞은 진흙은 더욱 질퍽해졌고, 나무와 돌은 훨씬 미끄러워졌다. 그나마 다행으로, 대원들은 산행 중 진흙길 위에 깔린 약 2km의 나무다리를 만났다. 그 긴 나무다리를 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흙에 빠졌을까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빗속에서 나무다리를 건너는 일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아래를 주시해야 했다. 길옆으로는 르웬조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환상적인 경치는 겨우 사진 촬영을 핑계 삼아 구경할 수 있었다.

대원들, 진흙길 위에서 '슈퍼 마리오'를 넘보다

대원들은 '마리오풀'을 징검다리 삼아 진흙길을 건너갔다.
 대원들은 '마리오풀'을 징검다리 삼아 진흙길을 건너갔다.
ⓒ 이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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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들은 긴 나무다리를 2차례 건넌 뒤, 오르막이 반복되는 질퍽한 진흙길을 지나갔다. 비가 와서 진흙길의 상태는 훨씬 심각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마치 누군가가 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대원들은 진흙길 위에 나 있는 동그란 모양의 풀 위를 징검다리처럼 뛰어넘기 시작했다. 동그란 풀도 분명 본래의 멋진 이름이 있었겠지만, 대원들은 그 풀을 제멋대로 '마리오 풀'이라고 불렀다. 대원들이 풀 위를 건너뛰는 모양이 마치 유명한 게임인 '슈퍼 마리오'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리오가 물음표가 그려진 네모난 상자를 뛰어넘듯, 대원들도 있는 힘껏 점프력을 발휘하여 마리오풀 사이를 뛰어 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원들에게는 버섯도, 별도 없었다. 못 뛰면 진흙 족욕, 잘 뛰면 본전일 뿐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이번 산행은 전날보다 훨씬 피곤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르웬조리의 경치는 날이 갈수록 신비로워지고 있었다. 고도차에 따라 산의 경치가 크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는 재미는 꽤 쏠쏠했다. 그렇게나마 대원들은 지친 몸에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휴식시간, 이럴 땐 차라리 남자가 되고 싶어

휴식 시간. 르웬조리는 어느 곳이나 화장실이다.
 휴식 시간. 르웬조리는 어느 곳이나 화장실이다.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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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도중에 대원들은 잠시 쉬기로 했다. 바위에 앉은 대원들은 잔뜩 지친 모습이었다.

휴식은 산행 약 1~2시간에 한번 꼴이었는데, 이 때 대원들은 챙겨둔 간식을 먹거나 경치를 사진기에 담았다.

어떤 사람들은 잠깐 볼일을 보기도 했다. 산장에 가기 까지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르웬조리에서는 어느 곳이나 화장실이었다.

하지만 르웬조리에서 볼일을 볼 때만큼, 여자 대원으로서 남자가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남자 대원들은 어느 곳에서든 간편하게 볼일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산행 중에 가이드가 배낭을 내려놓을 때는 내가 알아서 뒤로 돌아 서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여자인 내 상황은 달랐다. 볼일을 보려면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 가깝고도 먼 곳으로 탐사를 떠나야 했다. 게다가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 장소를 찾아도 르웬조리에는 진흙이 많았기 때문에, 볼일을 보기도 불편했다.

이번 휴식 시간에도 남자 대원들은 간단히 뒤로 돌아서서 볼일을 보았다. 나도 볼일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방은 진흙이었고, 주변은 온갖 식물들로 우거져 있었다. 굳이 멀리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는 대원들과 4m 가량 떨어진 나무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러자 내 행동을 알아차린 짖궂은 대원들은 볼일 보는 내 모습이 보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부끄러워진 나는 볼일을 보는 동안 잔뜩 긴장을 했다. 그렇게 겨우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는…. 왜일까, 내용은 다르지만 가수 쿨이 부른 노래 '운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럴 땐 차라리, 남자가 되고 싶어!'  

산행 7시간 뒤 마침내 부주쿠 산장에 도착하다

진흙길을 건너가는 오현호 대원.
 진흙길을 건너가는 오현호 대원.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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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이 끝난 뒤, 대원들은 다시 먼 길을 떠났다. 대원들은 부주쿠(Buzuku)라는 커다란 호숫가를 지나기도 했다.

예쁜 호수는 아니었지만, 잔잔한 호수 위로 구름이 낮게 깔린 풍경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물가인지라 진흙길은 그대로 건너갈 수 없을 만큼 깊고 끈적였다. 그래서 대원들은 또 다시 풀 위를 건너 뛰는 슈퍼 마리오가 되었다.

그래도 대원들이 마리오보다 나았던 것은 언제나 그날의 마지막 단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산행 7시간 뒤, 대원들은 목적지인 부주쿠 산장(3962m)에 도착했다. 산장에는 이름 모를 특이한 식물들이 많았다.

르웬조리에 오기 전에 식물 공부 좀 하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틀 앞둔 정상 공격과 다가오는 불안감

바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곽동일 대원.
 바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곽동일 대원.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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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들은 산장에 도착해서도 다음 날을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다음 날 대원들은 정상 바로 아래 산장인 엘레나(Elena) 산장(4430m)까지 간다고 했다.

그런데 엘레나 산장은 비좁고, 그곳에는 포터들이 잘 곳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대원들은 엘레나까지 들고 가야할 짐과 그 다음 산장인 키탄다라(Kitandara) 산장(4023m)으로 옮길 짐을 나눠야 했다.

짐을 나누면서, 나는 정상 공격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그러면서 정상 등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도 커졌다.

대장님은 대원들에게 준비해 온 안전장비가 부족한 편이라고 말씀하셨다. 정상까지 대원들과 함께할 가이드의 실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부주쿠 산장에는 고산병을 주의하라는 경고문이 있었다. 벌써 대원들이 오른 산의 고도는 3962m. 이미 일부에게는 약간의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복용한 예방약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모든 일이 잘 되길 기도할 뿐이었다.

까만 밤, 별들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다

시간이 흐르고 르웬조리에 또 다시 밤이 찾아왔다. 산장 밖으로 나가보니 까만 밤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별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밤 하늘은 하얀 별로 뒤덮여 있었다. 르웬조리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진풍경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별들이 많은데 굳이 별 하나 정해두고 소원을 빌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모든 별들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었다. 감히 예언도 했다.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두가 정상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무사히 등반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자 나의 착각이었을까. 온 별들이 우리 위에서 더 밝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내게 용기를 준 별들처럼, 아마 다음 날을 기대하던 내 눈동자도 초롱초롱 반짝였을 것이다.

셋째날 도착한 부주쿠 산장(3962m).
 셋째날 도착한 부주쿠 산장(3962m).
ⓒ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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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오지탐사대, #아프리카, #우간다, #르웬조리,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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