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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 선선한 공기가 느껴지면서 주방 한 구석에 놓여있는 빙수기가 썰렁해 보인다. 이젠 집어넣어야지 하다가 미뤄왔던 빙수기, 올여름에 나는 이 빙수기로 '팥빙수아줌마'라는 달콤한 이름이 생겼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이웃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내 양 손에 짐이 들려 먼저 탄 사람에게 몇 층을 눌러달라고 하는데 아는 엄마가 인사를 한다. 제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초등학교 일학년인 아이가 날 보고 말했다.

 

"팥빙수 아줌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팥빙수재료를 주는 모 사이트에서 선물이 왔다. 우리 집 작은애는 빵집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팥빙수를 먹어야 여름을 났다고 하는 녀석이다. 작년엔 과일팥빙수 한 그릇에 2500원이었는데 올해는 3000원으로 값이 올랐다. 언젠가 작은애와 가게 앞을 걷다가 녀석이 빵집 문에 걸려있는 팥빙수 그림을 뒤돌아보았다. 녀석이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모른척했다.

 

"엄마, 내가 팥빙수 사달라고 할까봐 빨리 걷는 거지? 나 **에서 댓글 달면 팥빙수재료 준다고 해서 뭐라고 썼는데 됐대. 재료 오면 그때 팥빙수 실컷 해먹자!"

 

나는 녀석이 오죽 팥빙수가 먹고 싶으면 그러나 싶었다. 그래서 지나쳐온 빵집을 가리키며 한 그릇 사 주마 했다. 녀석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재료가 오면 그때 자주 해달라고 했다.

 

녀석이 말할 땐 건성으로 들었는데 막상 물건을 받고 보니 당장에 팥빙수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먹는 일에 철이 따로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팥빙수는 한여름에 먹어야 제격이다. 동네에는 빙수기를 파는 곳이 없어서 대형할인점에 갔다. 한 계절에만 쓸 것이니 비싼 건 아예 손도 안댔다. 요리조리 살펴보고 만원미만 가격대에서 하나를 골랐다.

 

 

 

점심 먹고 출출해질 때쯤 햇빛은 머리가 벗겨질 정도로 짱짱했다. 폭염경보가 내린 한여름 대낮에 빙수기를 돌리느라 녀석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우리 모자(母子)는 앉은뱅이 식탁에 단팥과 빙수인절미, 젤리와 연유 따위를 꺼내고 덩어리 얼음을 갈아대느라 손을 빠르게 놀렸다.

 

빙수기에 들어간 얼음이 드르륵 갈려 떨어질 땐 꼭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새하얀 얼음가루가 그릇위로 적당히 쌓이면 밥숟갈로 단팥을 서너 번 푸짐하게 떠 넣는다. 딸기시럽은 포실포실한 얼음가루 위에서 붉고 선명했다. 그 위로 부드러운 연유와 과일젤리, 깍두기 같은 빙수인절미를 폼 나게 올리고 고소한 미숫가루를 뿌리면 가게서 파는 팥빙수는 저리가라다. 먹다 남은 콘플레이크나 건포도를 넣어도 좋았다. 팥빙수를 직접 만들어 보니 얼음가루와 섞어먹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응용하기 나름이었다.

 

복더위와 휴가철이 낀 주말, 두 부부가 식당을 하는 용하네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두 남매가 집에 있다는 표시다. 점심때가 얼추 지나면 개인택시를 하는 911호 아저씨도 들어올 것이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으니 이집 저집 살아가는 모양새만큼이나 들리는 소리들도 다양하다.

 

"엄마, 몇 집 남았어?"

 

녀석이 만든 팥빙수를 돌리며 이웃들 입맛을 잠시 시원하게 해주고 돌아오는 기분이 따끈했다.

 

"빙수야, 팥 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팥빙수를 만들면서 흥얼대는 녀석의 노랫소리가 가볍게 튀었다. 서로 어울려야 더 맛이 나는 팥빙수처럼 올여름 우리 동네 공기는 달콤하고 시원했다.

덧붙이는 글 | 세종뉴스, sbs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팥빙수, #빙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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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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