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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 두 개(각각 다다미 4장 반, 6장 크기)짜리 아파트에 살며 한 살짜리, 세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밤 근무가 있는 날은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낮에 남편이 잠자리에 들면 아이들은 울기는커녕 소리도 못 내고 놀지도 못해요. 그래서 저희는 거의 밖에서 시간을 보내지요. 기저귀랑 간식을 가지고 공원에 가요. 하지만 비라도 내리는 날엔 낭패지요. 그런 날이면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 가는데 그 집 남편이 우리 남편과 근무시간이 반대일 경우에만 가요. 그런 식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아요. 밤 근무를 시작한 지 사흘째가 되니까 남편이 피곤에 절어서 사람이 완전히 변한 것처럼 신경질을 내더군요. 일주일 동안 제대로 잠을 자본 날이 없는데도 낮 근무와 동일한 조건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피곤에 지쳐 일하러 나가는 남편을 배웅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게 돼요."

- <일본의 재구성>, 1부 4장('마음의 벽'), 도요타 자동차 한 직원 아내의 말에서, 194

 

제목에서 그 의미가 헷갈렸고 또 한국 현대사 한 줄기를 그대로 뽑아놓은 것 같은 <현대가족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여전하다. 그런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전후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현재의 일본에 '새출발'의 기반이 될 '새로운 해석'의 권리를 되돌려주자고 말하는 지은이의 섬뜩한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아, 말 그대로 긴 호흡이 필요했다. <일본의 재구성>(패트릭 스미스 지음/마티 펴냄)은 그만큼 복잡하고 위험스럽기까지 한 역사를 당차다 해야 할 만큼 불쑥 그리고 깊숙이 건드렸다.

 

이 책만큼 제목(원제는 'Japan: A Reinterpretation')을 수없이 보고 또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덩달아 책 앞을 장식한 그림들을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닛뽄'(일본)과 그 글자 아래 숨은 부서지는 파도 모양(일본의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의 주요 소재이며 호쿠사이의 그림이 유명하다고 한다), 흰색과 검은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옷을 입고 중앙에 서서 어딘가를 응시하는 한 여성, 그리고 일만엔 지폐의 주인공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가 '전후 일본사'의 과거와 현재 사이의 공간을 상징하는 듯이 흐릿하게 배치되어 있다. 미리 언급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여하튼 누구나 지은이의 일본사 '다시 보기'를 듣고 또 듣다보면 아마 다들 수시로 책 제목과 이 그림들을 보고 또 봐야만 할 게다.

 

일본은 얼음보다 더 굳은 얼굴을 한 채 과거 그대로 여전한데 왜 우리가 먼저 미래로 가는 문을 불쑥 열어주어야 하는가, 라고 질문하게끔 만드는 <일본의 재구성>. '일본의 재구성'이 무엇을 말하는지부터 명확히 하지 않고는 도저히 전후 일본사 전체를 훓고 가는 듯 보이는 이 책을 단 한 글자도 볼 수 없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일본의 재구성>. 그는 왜 일본에게 미국이 덧씌운 '전후 역사'의 그림자를 벗겨주고 그들 스스로 자기들 역사와 생각을 말하게끔 하자고 말하는 것일까.

 

일본에게 역사(의 해석)를 되돌려주자고 말하거나 그런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시아 사람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알고나 있을까? 그의 섬뜩한(!) 주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분명한 역사의 흔적 때문에도 그렇고 이러한 의구심 때문에라도 <일본의 재구성>은 이상하게 우리 시선을 더욱 끌어당긴다. 누구도 쉽사리 말하기도 드러내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그리고 새로운 해석을 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아시아 현대사에 과감히 '새로운 관점'(원제를 기억해보자)을 들이댄 패트릭 스미스. 그의 책도 그의 이름도, 그리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본 근·현대사를 이제는 더더욱 잊을 수 없을 듯하다. 이러한 복잡하기 그지없는 이유를 곱씹어보고서야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있었고, 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패트릭 스미스는 왜 일본의 '과거사'에 새 관점을 들이댔나

 

"국가적 정체성이나 역사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제에 관한 한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일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나는 미국인으로서 이 문제를 특별히 흥미롭게 생각한다. 미국인은 사실 큰 혜택을 받는다. 미국 바깥의 사람들이 미국 국민 개개인과 미국 정부를 기꺼이 구분해줄 의사와 능력 그리고 아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일본인들에게도 그런 구분을 해줘야 한다. 일본 정부의 관점은 일본 대중이 과거사에 대해 갖는 진심어린 감정 변화를 전혀 대변하지 않으며, 그런 변화를 맞아 일본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도 대중과 확연하게 차별된 시각을 보여준다. 우리는 일본인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겪는 사회적·개인적 고민을 알아보는 한편, 그들의 고민이 앞서 말한 '근대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힘겨운 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가 해소가 되고 나면 다른 하나도 자연히 해소될 것이다."(한국어판 서문, 11쪽)

 

일본의 현대사에 드리운 잘못된 시선(?)들을 하나하나 거두어내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새 해석을 이끌어내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 아는 우리 모두가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한다 한들 정말 '다른 하나도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누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고 누가 그것을 당당히 선언할 수 있을까? '가깝고도 먼 이웃'들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인데 말이다. 다방면으로 교류하고 국제사회 문제에 줄기차게 함께 동참해도 '아닌 것은 아니고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하는 게 옳다'고 다들 한 목소리를 낼 게 분명한데 말이다. 일본의 '과거사' 문제 말이다.

 

독자들이 품을 의구심이나 공분을 조금이나마 미리 풀어내주었기를 바라면서, 참 길고 긴 길을 돌아와 책 본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련다. 왜 그가 '현대 일본이 부끄러워 하는 진짜 일본'(한국어판 부제)을 드러내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새 해석'(여기서 다시 원제를 기억해보자)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지 말이다.

 

일본은 12세기 말 전후 강력한 쇼군시대로 접어들어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때까지 700여 년간 그 체제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오랜 쇼군시대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다시 급격하게 일본사회를 바꾸어놓았다. 쇼군의 압제를 풀어준 은인이라는 명성뿐 아니라 더욱 강력한 의미를 지니게 된 '신의 아들'로서 역사 전면에 재등장한 '덴노'(옮긴이는 일제 강점기를 떠올리게 하는 '천황'이나 사전에 없는 조합어인 '일왕'대신 원서('emperor')에 충실하게 일본식 발음대로 '덴노'라 부른다고 했다). 메이지 덴노를 시작으로 일본(엘리트들)은 서서히 그 시대 제국주의 국가들을 뒤따라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 흐름이 '전후 일본' 시기까지 이어졌다.

 

아주 간략하게나마 일본 근·현대사를 살펴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은이는 일본 근·현대사에 덴노를 앞세운 일본엘리트들의 제국주의 야심이 지금껏 드리워있는 만큼, 그 아래에는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이 자기들 스스로 현대 일본사를 그려가지 못한 안타까운 흐름이 있었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로선 매우 유감스럽다 할 만큼 그 진위를 수없이 확인해야 할 말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배경에는 2차 대전의 승자이자 전후 냉전시대의 한 축이며 공산체제 붕괴 전후로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해온 미국의 '원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 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코스(Reverse course)'로 불렸던 미국의 아시아권 반(反)공산화 정책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시아를 휘어잡은 경력을 지닌 일본을 미국이 서둘러 재무장시킨 과정을 총칭하는 상징적인 말이다. 당시 미국은 전후 얼마 안 되어 공산국가의 결집과 그 영향을 의식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일본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야하고 그것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지은이의 주장(또는 바람)에는 이런 역사 흔적이 깔려 있다. 결국, 이러한 주장의 숨은 배경 역시 아시아 각국의 관점이 아닌 서양 특히 미국의 관점일 수 있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책이 일본엘리트 시선이 아닌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 시선으로 근·현대 일본사를 바라보려 했다는 데 있다. 일본의 평범한 가정사를 듣거나 일본 내 '타자'들(재일한국인,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외국인 노동자 등등) 이야기를 담아내려 한 많은 현장 취재들이 지은이의 주장에 상당한 진정성이 있음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또한 '가깝고도 먼 나라'일 수밖에 없고 어떤 면에서는 영원한 '이웃이요 타자'이기도 한 일본과 미래 역사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은이의 노력을 쉽사리 내칠 수 없다.

 

일본 현대사를 외면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독자로서 그리고 옮긴이로서, 내게 한 가지 당혹스러웠던 점은 저자가 묘사하는 일본에서 한국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보였다는 점이다. 냉전을 맞은 미국이 반공을 위해 일본에서 전범들을 제자리로 복귀시키는 과정은, 해방 후 한국에서 일본식 관료체제를 유지하며 친일파들을 득세시켜 식민주의의 청산과 민주화를 저해한 모습 그대로다. 50~60년대에 갑작스런 외래 문화의 범람 속에서 전통을 부정하며 서구문화 콤플렉스를 느끼던 경험 또한 두 나라는 공유한다. 타자에 의해 주어진 민주주의의 이식에 실패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점 역시 닮았다. 집단의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은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여전히 그 잔재가 남아 있다."(487쪽, '옮긴이의 글'에서)

 

"공통점이 많은 두 나라지만 현대 한국사회의 경험 중에서 일본과 크게 차별되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 손으로 권위주의를 직접 붕괴시킨 경험일 것이다. 한국이 국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면, 일본은 패전 후 미국이 손에 쥐어준 헌법과 권위주의로 점철된 미지근한 민주주의 제도를 오늘날까지 별 변화 없이 고스란히 유지해왔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우리는 저자의 마지막 논점, 즉 일본 헌법 개정에 관한 논의에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제11장에서 전쟁 행위를 금지한 헌법 제9조를 없애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조명한다. (…) 책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과 논리적으로 일관된 결론이었으나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편치 않은 기분이었다. 과거의 식민 역사도 분명한 하나의 요인일 것이고, 헌법 개정 주장이 주로 일본 극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우리로서는 일본에서 헌법개정이 거론될 때마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의 논점은 친일우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일본을 유아적인 국가로 만든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이 핵심이다. 이 부분에서 오리엔탈리즘을 거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488쪽, '옮긴이의 글'에서)

 

이 책은 크게 1부('자기들끼리')와 2부('타자와 함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충실한 연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두툼한 흔적(일본사 연표, 주, 참고문헌)들이 그 뒤를 받치고 있다. 그러한 구성은 무엇보다 지금껏 설명한대로 '자기들끼리' 때론 숨기고 때론 당당히 큰소리 내며 이끌어온 '전후 일본사'의 발자취를 살피는 과정을 담고 있다(1부). 또한, '타자와 함께'한 역사이기에 어딘가 허전하고 부담스런 흔적이 가득함을 부인할 수 없는 일본의 쓰린 속내를 드러내는 과정을 담기도 했다(2부).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일본의 근·현대사에 드리운 어둔 그림자들이 상당 부분 우리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수시로 느낄 수 있다. 재일일본인을 비롯한 '타자'들 이야기도 그렇고, 자의반 타의반 급격한 현대사 흐름에 속절없이 끌려 다닌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특히, 자기 나라 현대사가 애초에 외부 힘에 떠밀려 진행되었고 그 안에는 우리나라의 친일청산 문제와 같은 못다 한 '과거사'들이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연관된 고민을 안고 있다. 사회 곳곳에 여전한 군대식 문화, 서열에 미친 교육제도들도 빠질 수 없는 공통 관심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후 역사'에 대한 상반된 시각은 일단 전혀 다른 문제임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재차 말하지만, 누구도 쉽게 '전후 역사'에 '다시 보기'를 넘어서 '새로 보기'(한 번 더 원제를 기억해보자)를 시도하기 어려울 게다. 그러나 일본 안에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역사가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흔히 말하는 일본 내 양심 세력에 관한 얘기 역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나오는 이야기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지은이의 대담한 주장과 확신 그리고 희망에는 이렇듯 평범한 일본 시민들 삶에 감추인 '다른 일본'을 보려는 힘든 노력이 담겨 있다. 물론 이런 식의 논의에 얼마나 동의하고 참여할 수 있는지는 사실 별개 문제이다.

 

좋은 싫든 역사는 결코 한 쪽의 목소리만 담을 수 없다는 엄연한 기본 원칙을 잊지 말자. 좋든 싫든 지난 역사를 넘어서 앞에 놓인 역사를 (일본과) 함께 바라봐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는 점도 잊지 말자. 그리고 역사를 잊어버리는 순간 역사는 되돌아온다는 진실 역시 결코 잊지 말자. 그렇다면, 이제 <일본의 재구성>을 읽게 될 이들이 나름대로 각자 일본(역사)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 볼 가치와 방법을 얼마간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 여기 일본 현대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강력히 추천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일본의 재구성-현대 일본이 부끄러워하는 진짜 일본> 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2008.  2만6000원.
(원제) Japan: A Interpretation by Patrick Smith(1998)


일본의 재구성 - 현대 일본이 부끄러워하는 진짜 일본

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2008)


태그:#일본의 재구성, #패트릭 스미스,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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