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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에 새로 지어진 역사관과 관리사무소 때문에... 

 

장릉(사적 제196호) 현장에 도착하니 비는 이제 거의 멈췄다. 장릉에 와 본지가 한 10년은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장릉의 모습이 상당히 낯설다. 그동안 장릉이 너무 많이 변한 것이다. 우선 단종 역사관과 재실 형태의 장릉 관리사무소가 앞에 있어 전체적으로 답답한 느낌이 든다.

 

"한국 왕릉의 특징이 뭐꼬? 자연과의 조화 아닌가베. 그래 맞다 카이, 장릉은 정화라는 이름으로 베려버렸다 아이가."

 

나는 먼저 장릉 묘역 입구 오른쪽에 있는 정자를 찾아간다. 배견정(拜鵑亭)이다. 지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인다. 확인해 보니 1792년(정조 16)에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세운 것이라 한다. 다음으로 장릉을 오르는 계단 옆에 있는 낙촌비각(駱村碑閣)을 들여다본다. 이곳에는 영월군수를 지낸 문경공 낙촌 박충원(朴忠元) 기적비가 있다. 1973년 4월 박충원의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는 없다.

 

'연려실기술' 제11권 '명종조의 문형'에 보면 박충원은 영월군수로 내려가 단종에게 제사를 지낸 사람이다.

 

"중종 신축년(1541)에 영월 군수로 나갔는데, 그 고을의 전 임원이 계속하여 갑자기 죽었으므로 충원이 제물을 정결하게 마련하고 단종(端宗)께 제사하니, 이로부터 죽는 일이 없어졌다."

 

 

비각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소나무들이 빽빽한 게 산책하기에 참 좋다. 우리나라 왕릉의 아름다움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에 있는데 자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소나무이다. 그리고 강원도 지역에 있는 소나무는 더 굵고 더 꼿꼿해서 기품이 더 있다.

 

오솔길을 따라 능에 가까이 가니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린 낙락장송이 눈에 띈다. 능 위에서 내려오는 상서로운 기운이 잠깐 이곳에서 쉴 것 같은 느낌이다. 능 위로 오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그들로 하여금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할 것도 같다.

 

그래도 능에 오르니 비갠 후 모습이 너무 좋다

 

 

소나무 길이 끝나고 앞으로의 조망이 확 트이면서 장릉의 봉분과 곡장 그리고 석물들이 보인다. 장릉은 다른 능에 비해 규모가 작고 아담하다. 벽돌이나 기와의 모양으로 보아 곡장은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봉분 앞에는 들어갈 수 없도록 목책을 둘렀다. 목책 밖에서 석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수가 일반 왕릉의 절반 밖에 되질 않는다.

 

봉분이 있는 상단에는 봉분 앞 가운데 혼유석이 있고 그 좌우에 망주석이 하나씩 서 있다. 망주석 뒤 봉분 옆에는 좌우로 양석이 하나씩 보인다. 보통은 양석 뒤에 호석이 있는데 호석은 보이지 않는다. 하단에는 가운데 장명등이 있고 그 좌우에 문인석이 각각 하나씩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문인석 앞으로 양쪽에 마석이 각각 하나씩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다른 능에서 볼 수 있는 무인석이 없다.

 

 

이들을 보고 나서 나는 능을 옆으로 돌아 곡장 뒤로 올라간다. 사실 능은 앞에서 보는 모습도 좋지만 뒤로 올라가 능과 어우러진 자연과 풍수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능 위 기가 모이는 곳에 서서 주산으로 이어지는 혈, 안산과 조산으로 이어지는 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풍수의 첫 번째 과제이다. 그리고 좌청룡 우백호를 따져 풍수의 기본을 공부하는 것이 두 번째 과제이다.

 

풍수의 초자인 나는 그 중에서도 앞으로 보이는 전망을 최고로 친다. 장릉은 북동쪽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멀리 보이는 주산이 발산(675m)이다. 그리고 능 바로 앞으로 나무들이 울창한 나지막한 능선이 안산 구실을 한다. 가까운 곳보다 먼 곳의 조망이 좋다. 산야의 초록과 푸르름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비갠 오후의 모습이 이처럼 좋을 수 있을까?

 

장릉 아래에 있는 과거의 유산들

 

 

장릉의 능역을 내려오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자각과 비각 그리고 홍살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들 건물 외에 영천과 배식단사, 장판옥이 보인다. 이들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계단을 내려가 평지에 이르니 먼저 장판옥이 나타난다. 장판옥(藏版屋)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일종의 사당이다. 정조 15년(1791)에 세워졌다고 한다.

 

 

홍살문 오른쪽으로는 비각이 있고 그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뒷면의 기록을 보니 영조 9년(1733)에 세워진 것이다. 돌도 깨끗하고 글씨도 단정한 게 너무나 좋다. 비각을 지나 정자각에 이르니 문이 활짝 열려있다. 단종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왕릉에서 보던 여느 정자각과 다르지 않다. 단지 규모가 작고 주초석과 계단 등에 장식이 없다. 비각과 함께 후대인 영조 9년(1733)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정자각 앞으로는 영천(靈泉)이 있는데 단종에게 제를 올릴 때 이 신령스런 샘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우물 뒤로는 영천이라고 새긴 비석이 하나 있는데 1791년(정조 15년)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기정(朴基正)이 우물을 수축한 후 세웠다고 한다. 홍살문과 정자각 주변에 있는 이들 과거의 유산이 장릉의 모든 것이다. 홍살문 밖으로 나오면서 길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유산들은 나중에 옮겨 왔거나 현대에 신축한 것이기 때문이다.

 

엄흥도 정려각에서 느끼는 충성과 절의   

 

 

홍살문을 나와 단종역사관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이 있다. 영조 2년(1726년)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1879년(고종 16년)에 세운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의 내용을 읽어보면 엄흥도가 영월 호장에서 충의라는 시호를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영조 2년(1726년)에 어명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가 세워졌고, 순조 33년(1833년)에 자헌대부 공조판서를 증직 받았으며, 고종 13년(1876) 충의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고종 16년(1879년)에 비석의 내용을 새로 고쳐 세웠다. 이 비문에 새겨진 큰 글자는 다음과 같다.

 

 

"조선의 충신으로 영월군 호장이었으며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증직 받았고 충의라는 시호를 받은 엄흥도의 정려이다. (朝鮮忠臣 寧越郡戶長 贈 資憲大夫 工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諡 忠毅 嚴興道之閭)"

 

영월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주검을 수습하여 장사지낸 일은 이후 수많은 책에서 조금씩 변형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맞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나 큰 틀은 엄흥도가 관풍헌에서 죽은 단종의 시체를 수습하여 마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렸으나 엄흥도는 그 일을 기꺼이 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엄흥도는 충신이고 의사이다.

 

엄흥도의 충의를 기리는 이 비석과 정려각은 원래 영월읍 영흥리(永興里)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영월읍의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가 나면서 1969년 5월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장릉을 나오면서 깨닫게 된 역사의식

 

 

장릉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단종역사관이다. 1층과 지하층으로 나눠져 있는데, 1층에는 단종에 관한 자료가 지하층에는 단종비 정순왕후와 사육신과 생육신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1층 단종관은 다시 단종의 시대, 단종의 승하, 단종의 복권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곳에는 현대에 와서 이루어지는 단종문화제에 대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단종문화제는 42회나 치러졌는데, 2007년에는 단종 승하 550년을 기리는 단종 국장을 재현함으로써 전국적인 행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단종 국장 재현 행사는 관풍헌에서 출발 장릉에 이르는 발인행렬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이다. 물론 영혼의 영면을 기원하는 견전의, 관을 묻기 전 드리는 천전의,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반우 행렬 등도 의미 있지만 사람들은 발인행렬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지하 전시실은 다시 사육신과 생육신실, 정순왕후실, 조선 궁중복식실로 나누어진다. 사육신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이다. 이들은 세조 2년(1456년) 단종의 왕위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충의와 절개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 후세에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생육신은 김시습, 이맹전, 조려, 원호, 성담수, 남효온이다. 이들 역시 벼슬을 버리고 절의를 지키며 평생 은둔해 살았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하는데 사육신의 예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이들 사육신은 패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더 높이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적인 능력이나 학문적인 식견 등에서 뛰어났던 신숙주 같은 인물이 이들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상당히 욕을 먹고 있으니.

 

사육신이 훌륭한 인물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들과 다른 노선을 걸었던 인물들에 대해서도 공정한 평가를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역사를 올바로 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마 장릉에 묻힌 단종대왕도 복권되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종을 복권시킨 숙종은 역사의식이 대단한 임금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역사의식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태그:#장릉, #장판옥, #영천, #엄흥도 정려각, #단종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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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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