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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여인에게, 미지의 소녀에게, 미지의 아가씨에게, 여하튼 이름 모를 어느 여학생에게 '필'이 꽂혀 생전 안 쓰던 편지도 온갖 정성 들여 써봤을 법한 시절. 그게 어디 이 책의 화자 동순만이 겪은 일일까.

 

그 시절 이야기는 왜 그토록 누구에게나 동시대이며 생방송 같은지. 하긴, 내게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다, 아니 없었다고 말하지 못하리니. 다들 이 질문 아닌 질문을 피하지 마시라.

 

굳이 악동이라 하지 않아도 하는 짓이 영락없이 ‘예쁜’ 악동 5명이 우리 앞에 ‘미지의 ○○○’와 함께 나타났다. 그 전에 악동 5명과 끝 모를 결투를 펼친 끝에 여섯 번째 일원이자 ‘짱’이 된 한 녀석이 있다. 그의 안쓰러운 끈질김과 복잡한 눈빛은 이제 6인의 악동이 된 이들 10대 시절을 영원한 기억, 곧 추억으로 만들어냈다.

 

고교 시절은 중학생, 초등학생 시절과는 다른 그 무언가가 있다. 뭘 해도 어색하고 미완성인 10대 시절을 마감하는 때이기도 하고, 그 반대로 평생을 두고 이뤄가야 할 삶의 밑그림을 그려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차라리 그 모든 어려운 질문들을 내던지고 끝없는 자기 여행에 빠져들기도 한다. 최인호 작가의 <머저리 클럽>은 그 슬프도록 아름답고, 미치도록 그리운 고교 시절을 재방송으로 아니 지금 다시 생방송으로 보여준다.

 

아름다웠기에, 그래서 그립기에, 또 한편으론 무서웠기에

 

"나는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것이, 그의 말이, 내가 기댄 돌담이, 겨울의 추위가, 소림이가 내가 주저하고 있는 동안에 영민이를 만나주었던 그 수많은 역설이 무서워져서 돌담의 차디찬 벽을 아프게 쥐어뜯고 있었다."

 

자기 세계, 또는 몇몇 친구들과 연합전선을 펼쳐 만든 공동 구역에서는 아무도 함부로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며 어렴풋이 자기 색깔을 만들어가는 시절이 있다. 너무 어리지도 그렇다고 세상 물정에 도가 튼 나이도 아닌 시절에야 이런 어설픈 놀이가 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함께 보려는 '그 시절'은 바로 고교 시절이다.

 

'머저리 클럽'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들 '바보같은 녀석들' 이야기가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체구는 물론 움직임조차 작아 보여도 옹골차고 세심한 멋이 있어 '굴러온 돌'임에도 '박힌 돌' 위에 선 영민을 이 책의 화자 동순은 잘 알아보았다.

 

여기 등장하는 '머저리 클럽'은 바로 고교 시절 여섯 악동들의 모임 이름이다. 처음에는 다섯 명으로 모임을 시작했던 이들은 전학 온 영민이를 맞이하며 여섯 명이 된다. 물론 이들은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이름 모를 아리따운 여인을 위한 자리 하나쯤은 늘 준비해둔다. 금방 들키지 않을 수 있는 마음 한 구석에.

 

"몇 달 동안 난 줄곧 그 생각만 해왔어. 이제 소림이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저번 그 일이 있은 후 바닷가에 갔다 왔어. 가서 겨울의 바다를 보았어. 파도가 성이 나서 바람에 흩날리고 있더군. 소림이를 좋아했던 것은 내 인생 최초의 사랑이었어. 영민아, 우습지 않니? 우리가 사랑이니, 연애니 얘기하는 것. 나 참 좋은 경험을 했던 것 같아."

 

혼자 외로이 이 시절을 보냈다 해도, 먼발치에서 돌아보는 고교 시절은 누구에게나 그림 같은 시절이다. 도전해서 아름다웠고, 꿈꾸어서 행복했고, 두려워하면서도 미지의 여인에게 도전하는 어설픈 도전 정신이 있어 멋있었다. 여자들도 내심 그렇겠지만, 남자들의 풋사랑이 단지 한 미지의 연인을 향한 감정만은 아니다. 그건 차라리 그 시절 있었던 모든 일들을 되살려 추억하는 공통분모라 해야 옳다.

 

'굴러온 돌' 영민의 제안으로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된 '바보 악동들의 모임', 곧 '머저리 클럽'은 그대로 그 시절을 투영하며 최인호의 책 <머저리 클럽>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에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오히려 환영받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이 책은, 성인이 되면 영락없이 말문이 막히곤 하는 바보 같은 남자들의 바보 같은 시절을 담고 있어 뭇 남성들의 부끄러운 일기 한 장면을 예쁘게 색칠한다. 자, 모르긴 몰라도 분명 곳곳에서 멋쩍어하면서도 속절없이 그 시절을 토해내는 이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

 

누군들 한 때 '악동'이 아니었을까

 

고교 3년을 그대로 관통하는 <머저리 클럽>은 고민, 사랑, 우정, 꿈, 공부 등 그 시절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영원토록 아름답기만 할 것 같은 고교 시절은 대학 입시와 졸업이라는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할 당연한 수순으로 하염없이 나아간다. 언젠가는 이 시절이 끝날 것임을 미리 조금씩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그래도 그 '마감시한'이 오기까지 '머저리 클럽'은 그들만의 추억을 그리고 담아내기에 바쁘다. 그만큼 우리도 우리 이야기 같은 그들 이야기를 보고 또 보기에 바쁘다. 이상하게도 '마감시한'은 늘 저 멀리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그 시절'은 늘 영원할 것만 같다. '머저리 클럽'도 영원하려나? 그건 잘 모르겠다.

 

'있을 법한 이야기, 그래서 언젠가 분명히 있었을 이야기'를 참 제대로 다 드러낸 <머저리 클럽>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물론 지금껏 얘기했듯이 2008년에도 우리는 이 시대 '머저리 클럽'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혼자만 고민하던 것을 끌어안고 가출을 시도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아쉬워하며 시간을 곱씹고, 보낼까 말까 고민하며 수없이 시와 사랑을 읊어대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못된 생각, 못된 짓' 하던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여기 <머저리 클럽>에 있다.

 

고교 시절을 보낸 이들은 누구나 두려운 도전, 아련한 풋사랑, 멋쩍은 일탈 한 장면쯤은 알고 있다. 지금껏 그것을 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머저리 클럽'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 '머저리 클럽'을 자연스럽게 술술 온 몸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이들 여섯 악동, 그러니까 이 '눈치 없는 조조 멍텅구리 거지발싸개 같은 우매한 온달이 사촌 같은 녀석들' 이야기는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어느덧 우리 이야기를 스친다.

 

<머저리 클럽>을 읽는 그대는 오늘이라도 당장 보고픈 옛 친구를 하루 빨리 찾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지 모른다. 그가 나처럼 그때를 같은 마음으로 기억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나는 모르는 어떤 비밀을 화들짝 놀랄 만큼 다 드러낼지도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참 많이도 달라진 '너'와 '나'는 오늘 이대로 묻어버릴 수 없는 그 이야기들을 끌어안고 '머저리 클럽'으로 다시 만난다. 그때 그 시절 날 것 그대로.

덧붙이는 글 | <머저리 클럽> 최인호 지음. 랜덤하우스, 2008.


머저리 클럽

최인호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8)


태그:#머저리 클럽, #고교시절, #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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