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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떴다. 유난히 높은 이탈리아 호텔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은 아직 어둠 속이었다. 일어나서 호텔의 두터운 커튼을 들춰보아도 아직 밖은 해가 솟지 않았다. 나는 시차 적응이 안 된 몸을 침대에 다시 누일까 하다가 바깥 세상의 바티칸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새로 산 스트로보를 카메라 가방에 넣고 호텔을 나섰다.

 

시간은 새벽 4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지만 내가 생활했던 서울을 기준으로 보면 오전 11시를 넘어 선 시간이었다. 단지 어제 잠을 늦게 들어서 잠을 잔 총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어제 밤과 마찬가지로 바티칸의 돔은 노란 조명을 받으면서 유독 성스럽게 빛나고 있었고, 호텔 앞 도로에는 소형차들만이 가지런히 줄을 서서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이 부족한 역사 도시 로마에는 건물 밖 차도에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길가의 음수대에서는 새벽에도 여전히 시원스런 물줄기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시원한 물에 손을 적셨다.

 

바티칸 앞 대로에는 차가 거의 한 대도 다니지 않고 새벽 운행버스의 도착 시간을 알리는 표지판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티칸 남쪽 구석의 블록을 돌아드니 그 유명한 바티칸의 둥근 열주(列柱) 회랑이 눈에 들어 왔다. 총 284개의 대리석 열주가 4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 열주는 반원형을 그리며 베드로 광장을 감싸 안고 있었다. 이 열주를 넘어서면 바로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바티칸 시국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한꺼번에 50만 명을 수용한다는 성 베드로 광장에는 사람 한 명 없고 노란 나트륨 조명등만이 밝히고 있었다. 나는 열주 입구를 막아선 철제 가림막을 넘어서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은 채 여기저기 사진을 남겼다.

 

나는 사진을 찍으려 무심코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광장 안 오벨리스크 아래쪽에는 차량 한 대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차는 바티칸 경찰차였다. 그런데 이 차가 나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나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예, 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언제 들어올 수 있지요?"

"일요일이라 박물관은 문을 열지 않으니 11시에 오세요"

 

나는 괜히 말을 더 붙여 보았다.

 

"사진 몇 장 더 찍으면 안 될까요?"

"나가 주세요."

 

순간, 이 사람이 경찰이니 내가 이렇게 농담할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열주 밖의 이탈리아 땅으로 나갔다.

 

 

나는 열주 밖을 돌아 베드로 성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열주 위의 성인들 조각상 위로는 어제 밤에 보았던 보름달이 아직도 떠 있었다. 이제 저 달이 지면 곧 해가 솟아오를 것 같았다. 나는 성인상 위에 밝게 빛나는 달을 보면서 이곳은 참으로 성스러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비추는 달이 베드로 성당 위에서 더욱 신비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면서 베드로 성당 앞에는 사람들도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미국 사람으로 보이는 배낭족 2명이 배낭을 메고 성 베드로 광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가끔씩 작은 승용차와 버스들이 일요일 아침의 거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서 테베레(Tevere) 강을 향한 델라 콘실리아치오네 거리(Via della Conciliazione)에는 아직도 나트륨등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이 거리의 이름은 한국식으로 한다면 '화해의 길'인데 일직선으로 뚫린 길이 500여m의 넓은 도로다. 당시에는 현재 콘실리아치오네 거리 옆의 갓길로 사용되는 좁은 길이 성 베드로 성당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길이 현재와 같이 뚫린 것은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탈리아의 정권을 잡고 있던 1936년 10월 28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을 이끌던 무솔리니는 교황청과의 화해조약 체결을 했고,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이 더욱 장대하게 보이도록 하고 싶었다. 그의 명령 한 마디에 당시 이 길에 있던 중세 때의 아파트 700여 채가 철거됐고 넓은 도로가 들어섰다. 현재 넓은 도로 사이에 있던 주택지 블록 하나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길은 무솔리니와 교황청의 '화해'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지만 현재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타인을 용서하고 타인과 화해하라는 의미의 길로 알려져 있다.

 

나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베드로 성당의 돔을 보면서 화해의 길을 걸었고, 과거에 있었을 주택지의 좁은 길들을 생각해 보았다. 로마 쪽에 서니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화해의 거리는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이 완전히 변하는 거리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늦은 오후 시간에 '화해의 거리'를 다시 걷고 있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호텔로 쉬러 들어가면서 이 길을 다시 걷고 있었다. 로마시내 투어를 받은 내 다리는 너무 지쳐 있었다.

 

아침과 달리 거리에는 따가운 햇살이 내리쏟고 있었다. 대로변에는 뚜껑이 열린 2층의 로마시티 투어버스가 이국적인 야자수 옆을 지나고 있었다. 이 거리에는 서점이 있고 호텔이 있고 작은 성당도 있었다.

 

이름도 성스러운 성 베드로 카페에서는 이탈리아노들이 에스프레소 커피를 즐기고 있었고, 리스트로(RISTRO) 식당에서는 눈에 익은 피자와 스파게티를 팔고 있었다. 카페와 식당의 차양에는 한여름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커피 한 모금 마시라는 카페의 유혹을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이 거리에 앉아서 본 한낮의 바티칸은 성스러운 열기로 가득 차 보였다. 아침에 본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 지금 눈앞에 있는 베드로 성당인가 싶을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 화해의 길은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침에 베드로 성당 방향에서 화해의 길을 향할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늦은 오후 시간에 반대 방향으로 걸으면서 묘한 감상이 느껴지고 있었다. 걷는 동안 내내 정면의 거대한 베드로 성당이 점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길은 바티칸을 향한 화해의 길이었다. 나는 이 길을 다시 걸으면서 길 이름이 참 잘 지어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과 화해하고 성스러움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내가 증오하던 것들이 마음 속에서 빠져 나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아침의 베드로 성당이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왜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새벽의 베드로 성당 광장에 들어갔는지 자책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기는 2008년 7월 19일의 여행 기록입니다. 


태그:#바티칸, #베드로 성당, #콘실리아치오네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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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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