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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전설 남긴 백제왕

백제 무왕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후세에 전해주는 이도 많지 않다. 그 이야기들 또한 극적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236호, 절의 깃발인 당을 걸어두던 당간을 지탱하던 기둥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호, 절의 깃발인 당을 걸어두던 당간을 지탱하던 기둥 ⓒ 이기원
가난한 어머니를 모시고 마를 캐며 생활하던 서동. 선화공주를 좋아한 나머지 경주로 잠입해 들어가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퍼트려 끝내 사랑을 이룬 용의주도했던 인물. 재위 기간 왕비의 나라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했던 비정한 사람. 수도인 사비도 아닌 곳에 드넓은 미륵사를 창건해서 스스로 미륵이 되고자 했던 임금. 삼천궁녀의 전설을 남긴 채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의자왕의 아버지였던 인물….

긴 여름 장마를 앞두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미륵사지를 찾았다. 무왕이 창건했다고 알려진 5만여 평이 넘는 광대한 절터다. 이 절터를 돌아보면서 무왕이 남겨놓은 이야기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버스에서 내렸다.

5만여 평이 넘는 미륵사지는 이제까지 발굴된 우리나라 절터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지금은 남아 전하는 석탑과 당간지주를 통해서만 그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그나마 석탑은 복원을 위해 해체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해체되지 않은 기단부는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기단부만 내려다 봐도 입이 딱 벌어진다. 무너지지 않은 원래의 석탑은 9층이었고, 높이는 28m로 현재 아파트 10층 높이라고 한다. 단단한 재질의 화강암을 잘라 아파트 10층 높이의 석탑을 만드는 게 얼마나 엄청난 공사였을까. 더구나 미륵사 절에는 이 석탑 외에 닮은꼴의 석탑이 하나 더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석탑과 석탑 사이에는 높이 50~60m의 목탑도 있었고, 이 탑에 걸맞은 거대한 금당 건물도 셋이 있었다. 이른바 3탑 3금당 양식의 대표적인 절이 미륵사였다.

 복원을 위해 해체하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
복원을 위해 해체하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 ⓒ 이기원

정상 절차 밟지 못하고 등극한 왕

고대국가에서 불교는 단순한 종교로만 해석될 수 없다. 삼국이 불교를 수용한 의도는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지역마다 다른 토착신앙을 억누르고 중앙의 통치 이념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목적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이념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삼국은 모두 불교를 수용했다.

이렇게 정치적 목적으로 수용된 불교는 그 뒤로도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면서 확산되었다. 절의 규모를 통해 권력을 과시했고, 불상의 모습을 통해 왕의 권위를 부각시켰다. 부처는 곧 왕이라는 사상을 전파시켜 인간이 아닌 신성불가침의 왕권을 확립하고자 애썼다.

백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이유도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미륵사 창건을 통해 무왕이 이루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무왕 재위 시기 백제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한강 유역을 모두 상실한 채 공주를 거쳐 사비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위협 속에 힘겨운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더구나 무왕은 왕위 계승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정상적 왕이 못되었다. 익산에서 마를 캐며 생활하던 서동이 왕이 되었다는 전설은 정상적 왕위 등극이 아니었다는 걸 의미한다.

 1992년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1992년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 이기원

왕권강화에만 집착하고 백성 고통에는 무심

무왕이 왕이 되기 전, 백제의 왕위는 귀족들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다. 무왕 이전의 왕들의 재위 기간이 아주 짧았던 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는 세력이 약한 왕이 필요했고, 그래서 익산 지방에 살던 몰락 왕족 출신 서동을 왕으로 만들었다. 선화공주와의 결혼 또한 정략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무왕은 자신을 둘러싼 귀족 세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당당한 왕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터전이던 익산에 거대한 미륵사 창건을 주도했다. 단지 미륵사를 창건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왕 자신이 미륵불이 되고자 했다. 나아가서 귀족들의 세력 근거지인 사비에서 익산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이었다.

정략결혼의 대상이었지만 왕비의 친정이던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한 것도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라가 점령한 가야를 차지한다는 명분으로 그 전진기지 익산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익산 천도를 정당화시켰다.

귀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백제의 왕이 되고자 했던 무왕의 꿈은 그러나 아들 의자왕에 이르러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공격 앞에서 백제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무왕의 꿈은 왜 실패했을까. 귀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강력한 왕이 되고자 했던 무왕의 꿈에는 백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여 자신이 미륵이 되고자 했지만 그 거대한 미륵사 창건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감당하고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에까지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지금은 폐허가 된 미륵사지에 서서 실패한 무왕의 꿈이 주는 교훈을 되새겨보았다.

덧붙이는 글 | 7월 12일부터 13일까지 원주 학성중학교 학생 33명과 함께 <일본 문화의 원류 백제 문화를 찾아서>란 주제로 답사 및 역사 캠프가 진행되었다. 이 기사는 그 일정 중에서 익산 미륵사지 답사 과정을 쓴 기사다.



#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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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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