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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마저 멈춰버린 무더운 날씨엔 가볍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수필류가 그리울 때가 있다. 별 부담없이 경쾌한 마음으로 읽고 싶어서다.

 

그런 의도에서 고른 <아버지의 부엌>(사하시 게이죠 지음/엄은옥 옮김/ 지향 펴냄)은 '노년아버지의 홀로서기 투쟁기'라는 부제가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만으로 노년의 아버지가 펼쳐보이는 색다른 레시피 정도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고른 작품이었다.

 

그런데 아~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더니, 책도 마찬가지 아닌가. 제목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바로 책이라는 것이다. 얄팍한 내 선입견을 확실히 깨준 책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서늘해지고 또 서서히 무너졌다. 나이 여든의 남자가 홀로서기를 하는 과정을 쓴 이 책은 생각만큼 감성적이지도, 서정적이지도 않다.

 

이 책은 83세에 아내를 유방암으로 보내고 홀로 남은 '아버지'에 관해 딸이 관찰자 입장에서 쓴 책이자 기록이다. 그에겐 1남 4녀가 있긴 하지만 저마다의 사정으로 그와 함께 살 수 없는 형편이다. 가능한 자녀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포기하고 홀로서기를 선택하게 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60~70대 남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부인 생전에 부엌 한 번 들어가 본 일이 없다. 제 손으로 방을 쓸거나 청소를 하거나 세탁을 한 적도 없다. 가부장제 위주의 사회 분위기 탓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으레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메이지시대(1868년~1912년)에 태어난 아버지로서는 하루 아침에 천지개벽한 사건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내일 모레면 증손주를 볼 이 남자의 홀로서기 과정이 눈물겹다. 이 책의 지은이기도 한 셋째딸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아가며 홀로서기를 배우는데 이 딸, 보통이 아니다. 한마디로 독종이다 싶다. 그런데 이유가 있다. 혼자사는 늙은 남자일수록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홀아비 삼년이면 구더기가 서말이다'는 속담은 일본에서도 통하는지 그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딸을 아버지를 혹독하게 훈련 시킨다. 딸과 갈등을 일으키며 격하게 싸우며, 화해하고, 그리워하고, 가엾게 여기고, 다시 치열하게 싸우고... 그 과정에서 여든의 아버지는 서서히 홀로서기에 적응해간다.

 

83세 할아버지의 눈물겨운 '홀로서기'

 

자녀들의 관심과 보살핌, 친절한 이웃들 덕택에 아버지는 혼자 꾸리는 의식주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된다. 딸도 놀랄 정도로 아버지의 살림 솜씨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매일매일 싸워야 하는 외로움과 고독, 소외감이 바로 그것이다.

 

자녀들과 정답게 함께 살고 싶지만 자녀들에게 짐이 될까 봐 포기하는 모습, 먼저 간 아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모습, 정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대접받고 싶은 모습, 젊은이들과 똑같이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그는 그것과 날마다 싸우는 것이다. 청소를 얼마나 자주하고, 세 끼 식단의 균형을 얼마나 잘 맞추느냐, 철마다 이불과 옷을 잘 갈아서 내놓는냐는 피상적인 문제일뿐.

 

빈집에 사육 당하는 새 같은 몸, 주인이 가끔 먹이를 줄 뿐이다. 살아만 있다고 좋은 건 아니야. 나는 따뜻한 마음, 사람이 그립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따스한 감정을 맛보고싶다.

- 302쪽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다>는 드라마는 노인 얘기인지라 취침시간을 미루어가며 보았다. 주인공이 참 잘한다. 노인의 행동이 애처롭고 보고 있으려내 애가 타고 안타깝다. 노인이 하는 짓은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저렇게 안타까운 건가, 싶었다.

- 213쪽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아버지'가 참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딱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스럽고 무지한 생각인지 머잖아 알게 되었다. 작품 속 '아버지'는 곧 나의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 미래의 내 모습이 될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예외란 법은 없다.

 

노인문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예전에 프랑스 파리에서 고양이와 여생을 보내던 할머니가 그 고양이가 죽자 함께 따라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처음 그 기사를 봤을 때 할머니의 그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 <아버지의 부엌>을 읽고 다시 떠올려본 그 할머니의 심정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아마도 그 할머니는 산소 호흡기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나 물에 빠져죽기 직전의 절박한 상태였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을 읽고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남자들도 자기 혼자 살 수 있을 정도의 살림 실력을 반드시 갖춰야 할 것. '페미니즘' 그런 거창한 이론을 떠나 그것은 곧 생존능력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하나.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은 배우자에게 정말 잘 할 것. 오래오래 함께 살아야하니까.

덧붙이는 글 | 이 책은 1982년을 기준으로 씌여있다. 책 뒤편 작가의 에필로그는 그로부터 5년후의 일을 간략히 적어놓았는데 아흔가까이 된 나이에도 아버지는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고 씌여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 할아버지는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의 부엌 - 노년의 아버지 홀로서기 투쟁기

사하시 게이죠 지음, 엄은옥 옮김, 지향(2007)


#아버지의 부엌#노인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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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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