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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미술관에 가지 않을 테다!

 

루브르에서 나와 세느강변을 터벅터벅 걸으면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 20점 맞은 이래로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다. 그날은 엄마도 어이가 없었던지 그냥 아무 말 없이 시험지에 도장을 찍어주셨었지.

 

나는 남들과 다른, 뭔가 더욱 알찬 여행을 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자부했었다. 그 재미 없는 그리스 로마신화도 두번씩이나 읽고 왔는데. 미술시간에도 외우지 않았던 고전파 낭만파 인상파 야수파처럼 이름부터 요상한 회화사조들도 대강은 외우고 왔는데.

 

어제 밤에 게이에게 콜 받은 트라우마가 아직 채 잊혀지지도 않은판에 또 이렇게 먹물근성에 상처를 받다니. 이제 나는 남자도 아니고 지성인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전화방에 들어가 며칠 뒤 동생과 함께 유럽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 라는 후배에게 전화해서 "잊지마!! 루브르에서는 무조건 가이드투어를 받아!! 투어 비용이 아까우면 차라리 그냥 들어가지도 마!! 입장료 10유로를 땅바닥에 그냥 내다 버리는 짓이야!! 나도 이제 앞으로 바티칸 투어 말고는 미술관 안 갈거야!!" 라고 절규하고나니 그제서야 기분이 조금 풀린다.

 

이를 갈면서 다짐한다. 로마에서의 바티칸투어를 제외하고, 앞으로 미술관에 한번만 더 들어가면, 그 때는 내가 우리 아부지 아들이 아니라고...

 

그래도 오르셰에는 가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

 

딱 20분 뒤, 나는 우리 아부지 아들 되기를 포기했다. 아부지도 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돈만 펑펑 써지르는 아들 하나 없어지는 것쯤, 오히려 반기실게다. 그래도 오르셰 만큼은 꼭 가고 싶었다. 반드시 보려고 마음 먹은 그림이 한점 있었기 때문이다..

 

ⓒ 이중현

 

파리에는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대형 미술관이 세개가 있다. 루브르에는 주로 고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오르셰에는 19세기 전후 근대의 작품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퐁피두센터에서는 현대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시대순으로 루브르-오르세-퐁피두의 순서로 관람을 하는 것이 좋다는 정보도 이미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한국 배낭족들은 루브르에서 울고, 오르세에서 웃고 간다는 말도 있다. 오르셰에는 밀레나 마네, 고흐처럼 미술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익숙한 화가의 작품들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루브르보다는 친숙하기 때문이란다. 나도 오르셰에서는 루브르에서처럼 마냥 바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르셰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인상파 작품들이 많은 3층에서부터 차례대로 내려오면서 감상해야 한다는 가이드북의 친절한 설명은 처음부터 무시하고, 곧장 1층의 '그 곳'으로 향했다.

 

입구로부터 왼쪽 방에 있는 그 곳에는, 과연 그렇게 보고 싶었던 회화 사상 최악의 문제작,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이 떡 하니 걸려 있었다.  이런 그림을 보여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는 지금도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 같다.

 

물론 그 전까지도 여인의 나체를 소재로한 작품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지구를 지배하는자는 교양 있는 속물들이다. 노출된 부분은 절대로 강조되는 일이 없이, 옷을 벗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정숙한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는 이상한 금기가 퍼져 있었다.

 

지금도 어디다가 당당히 내놓기 멋쩍은 그림이니 19세기에 공개된다면 난리가 나게 될 것이 자명했다. 이 그림은 세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가리개 그림을 뒤집어 쓴 채, 이름조차 원제 '세상의 근원'이 아니라 'X'라고 바뀌어 불리며 파리에서부터 전 유럽을 떠돌아다녔다 한다. 마침내 오르셰에 걸리기전까지 여러사람 손을 거친 이 그림의 130년동안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터부에 도전하는 자의 시련과 고통 그 자체다.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니고 내가 태어난 곳, 나아가 세상 만물의 근원이 된 성스러운 부분을,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꼭꼭 감추어 거명조차 하기 힘들도록 교육 받아온 우리에게 이런 작품은 유례가 없다. '세상의 근원'이라는 이름조차 어찌나 역설적인지.

 

가랑이가 말을 하는것 같다. "부끄럽냐? 뭐가 부끄러워? 여자들한테는 하나씩 다 달린거야. 너네 엄마한테도 있다고. 나도 저기서 나오고 너도 저기서 나오고 하여튼 세상 모든게 다 저기서 나왔는데 부끄럽긴 뭐가 부끄러워? 그래 놓고 이따가 밤에는 제일 먼저 파고들거잖아!! 그래도 부끄럽냐? 에라이 위선자야!!"

 

나는 세상의 위선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수천년의 관습을 깨버린 과격한 거장 쿠르베의 작품을 진품으로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세상의 근원'을 보고 싶었던게 아니라, '세상의 근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내가 보기에는 참 민망하고 부끄럽고 몸이 배배 꼬이는 작품인데, 다른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지가 가장 궁금했다. 이것이 오르셰에 온 가장 큰 이유다.

 

길에서 늘씬한 다리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와 마주치게 되면, 그저 입 헤벌리고 쳐다보는것 보다는 주변에 있는 다른사람들의 시선들을 감상하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못본 척, 관심없는 척 하면서 몰래 흘낏거리는 눈빛들. 과연 예술의 정점 오르셰의 미술품을 감상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었다.

 

전혀 다르지 않다. 남자들은 애써 외면하면서도 흘낏흘낏 다 본다. 남자와 같이 온 여자는 어머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만, 정작 손가락 사이에서는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여자들끼리 온 경우에는, '이건 또 뭐야' 라는 말과 함께,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입술 양끝을 치켜세운채 자세히 들여다본다. 과연 아주 재미있다.

 

고흐와 화해하다

 

3층에 있는 고흐의 그림들이 정말 진품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박물관 직원들에게 물어봤자 당연히 진품이라고 대답할 거고, 의심 많은 친구라면 저게 어떻게 진품이냐고 따지고 들거다.

 

하긴 어떤 망할놈이 피에타에 망치를 집어던져서 성모 마리아 코를 깨먹었듯이, 누군가가 이 세기의 명화들에 해코지를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나라면, 진품을 갖다가 이렇게 관람객이 마음만 먹으면 캔버스에 손을 댈 수 있도록 액자에 유리 한장 덮지 않고 걸어 두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이 그림들이 정녕 진품이라면 오르셰 미술관장의 강심장을 칭송해야 한다. 그리고 설령 진품이 아닐손 치더라도 그럴만한 사유를 납득하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미술품 감정에 어지간히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아차리지 못해야 하니, 복사품이라도 진품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인 것만은 확실하다. 어쨌든, 어차피 나는 진품과 복사품을 구분할만한 재주가 없으니 그냥 속편하게 이 녀석들을 120년 전에 고흐가 직접 그린 진품으로 믿기로 한다.

 

 

나는 사실 고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지 싫은지를 굳이 택해 보라면, 차라리 싫어하는 쪽이었다. 고흐가 누구던가. 피카소, 다빈치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중의 한명이긴 하지만, 또한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도저히 이해 못할 기행을 일삼던 희대의 광인 아닌가.

 

꽤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작정을 하여 평생을 가난과 질병에 찌들어 살면서 생전에는 그림 한장 제대로 팔아본적 없으며, 친구도 별로 없는 주제에 그나마 함께 생활하면서 벗이 되어주던 고갱에게 칼을 들고 덤볐다는 에피소드 부터, 자기 귀를 자기가 잘라버리고, 끝내 권총 자살을 할 때도 머리가 아닌 가슴에다 방아쇠를 당겨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했다는 이 남자의 일생은 비호감의 극치이다.

 

고흐 특유의 강렬하기만 한 이런 화풍 또한 별로 와닿지가 않고 그저 우울해 보인다. 기존의 음영이나 투시원근법을 무시한 스타일이나 약간 삐딱한 구도는 산만하기가 이루 말할데가 없다. 그래 놓고서 동생에게 이 그림에 관해 쓴 편지에서는 침해 받지 않는 휴식을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책에서 내놓는 해석은 '작가의 불안한 정신세계를 표현한다'라는데, 그 해석대로라면 화가 되기도 정말 쉽겠다. 도저히 이해못할 그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흐라는 양반이랑 친해지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었다. 작품에 대한 뒷 이야기들, 고흐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엿 볼 수 있다는 카피문고에 혹해서, 고흐가 친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엮어서 만든 책을 사 읽은 것도 그런 노력중의 하나였다. '반고흐, 영혼의 편지' 는 그런 고흐의 편지와 함께 그림도 많이 삽입되어 있어서

고흐라는 화가를 알기에는 참 괜찮은 책이다. 하지만 그 책을 보고나서는 고흐라는 화가는 더욱 정나미가 떨어졌다.

 

과연, 어떻게 해야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뇌, 그림을 통해 자신이 보여 주고 싶은  여러가지 느낌들이라거나 생각들, 그리고 날씨나 건강상태 같은 소소한 일상들이 그의 화풍만큼이나 남성스럽고 거친문체로 잘 나타나있기는 하다. 하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돈 이야기다. 생활비를 동생에게 얻어 써야만 하는 가난한 예술가로서의 비참함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새로운 기법이 떠올랐어.  초록의 정원을 그리면서 녹색은 전혀 쓰지 않았어. 풍경화는 빨리 그리는게 더 나은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 아 그런데 물감이 부족한데 물감 살 돈 좀 보내주라. 매번 고마워하는거 알지? 빚은 꼭 갚을게'라고 계속해서 물감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것은, 경제적으로 동생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미안스럽기 때문인 것 같았다.

 

도저히 안 팔릴만한 그림을 그려 놓고서는 동생에게 '니가 열심히 팔려고 하지 않아서 그림이 안팔리는거야.' 하고 칭얼대는 것부터가 참 됨됨이가 글러 먹은 인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고흐에 대한 그 때까지의 생각들은, 반고흐의 방 진품을 보면서 모두 날아가버렸다. 고흐는 거의 하루에 한장꼴로 그림을 그려대는, 아주 다작을 하는 화가였다. 동생에게는 물감이 부족하다고 매번 징징댔지만, 그가 그린 그림을 바로 앞에서 보니 이 아저씨는 붓으로  색칠을 한게 아니라 아주 국자로 물감을 떠서 캔버스에 부어놨다.

 

<반고흐의 방> 침대 베개 부분 아저씨, 동생한테는 화구 살 돈 없다고 그렇게 칭얼대더니 그림에다가는 물감을 아주 들이 부었군요?
<반고흐의 방> 침대 베개 부분아저씨, 동생한테는 화구 살 돈 없다고 그렇게 칭얼대더니 그림에다가는 물감을 아주 들이 부었군요? ⓒ 이중현

 

대단한 아저씨다. 그렇게 가난한데도, 물감이 그렇게 비싼데도, 절대 물감을 아끼는 일 없이 강하고 선이 굵은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이래서야 천상 가난할 수 밖에 없다. '물감이 부족하니 당분간은 그림을 그리지 않거나, 혹은 적은 비용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것'은 범인의 경제관념이고, '물감을 원하는 만큼 쓰기 위해 굶주리는 쪽을 택하는것'이 고흐가 생각한 표현 방식인가 보다.

 

고흐는 단순히 작품을 위해  정열을 쏟아 붓네 혼을 바치네 하는 수준이 아니라, 숫제 자신의 피와 살점을 떼다 캔버스에 옮겼다. 무섭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고흐의 그림에는 여전히 정이 가지 않지만, 앞으로 이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겠다.

 

예술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화가가 목숨과 맞바꾼 그림들을, 나는 오르셰에서 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가짜시인#유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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