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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할머니가 깻잎을 주며 강의를 했다니까 혹자는 벌써 이런 상상을 할지 모르겠다. 나이 드신 노인이 채소를 들고 와서 그것을 준다는 핑계(?)로 살아온 이야기부터 당신의 자녀들 이야기를 늘어놓는 긴 강의를 들었나보다 하고 말이다. 그런지 아닌지 두고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을 터.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볼까 한다.

마을 할머니가 가져오신 깻잎들이다. 비닐 봉투가 약간 찢어졌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온전하게 따뜻한 듯하다. 시골에 사니 이런 일을 가끔 겪는 재미가 쏠쏠하다.
▲ 깻잎 마을 할머니가 가져오신 깻잎들이다. 비닐 봉투가 약간 찢어졌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온전하게 따뜻한 듯하다. 시골에 사니 이런 일을 가끔 겪는 재미가 쏠쏠하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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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셔? 아무도 안 계셔?"

여름 한 대낮에 우리 집 마당에서 누군가 불렀다. 우리 집은 대문이 없어서 마당에 들어서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구조이기에 거실 문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마을 할머니이시다. 손에 뭘 잔뜩 들었다.

"아이고, 목사님 계셨구먼. 이거 갖다 줄라고."
"안녕하세요. 이게 뭔데요."
"깻잎이유. 잘 드실라나 모르겄네."

하얀 비닐봉지 사이로 파란 깻잎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할머니의 텃밭에서 추수하셨다며 주신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려나 모르겠다고 연신 확인하시면서 말이다. 당연히 좋아할 텐데, 그래도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괜히 성가시게 하시나 싶기도 하신가 보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즐거운 화답이었다.

그런데 잠시 뒤돌아서던 할머니께서 한 말씀 하신다.

"아, 목사님 말여. 이 마늘 이렇게 말리면 안 되는 디유."
"그럼 어떻게…."

우리 집 처마 밑에 있던 마늘 한 꾸러미를 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강의를 시작하신다.

쪼갠 마늘과 마늘 파편들이다. 생각보다 상한 마늘이 꽤 나왔을 뿐 아니라 실제로 쪼개고 나니 알맹이만큼 껍질도 있다는 걸 한 눈에 알게 되었다.
▲ 마늘들 쪼갠 마늘과 마늘 파편들이다. 생각보다 상한 마늘이 꽤 나왔을 뿐 아니라 실제로 쪼개고 나니 알맹이만큼 껍질도 있다는 걸 한 눈에 알게 되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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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마늘을 이렇게 망사에다가 넣어서 걸어두면 잘 마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이여유. 이렇게 말리면 십중팔구 섞는 게 많다니 께. 이러지 말고 마늘을 일일이 쪼개서 볕에다가 말려유. 그람 두고두고 먹어도 안 상할텐 께."
"아, 예. 그렇군요."

할머니의 '초 간단 스피드 강의'가 끝났다. 가족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지식을 전달받았으니 강의가 많지 않은가. 그런데다가 정말 알짜 강의다. 말하자면 핵심만 찔러주는 '정곡 강의'인 셈이다.

"이렇게 하지 말고 꼭 쪼개서 말려유. 그람 후회 안 할텐께."

뒤돌아서 가시는 할머니는 신신당부를 하신다. 적당히(?)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할머니는 2~3번을 다시 마늘을 쳐다보시며 집으로 돌아가신다. 꾸부정한 할머니(약 80세)가 사라질 때까지 뒤에 대고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하고 나니 마음에 당장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그 방법은 해보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팔십 평생 살아온 농촌 할머니의 노하우가 보통 노하우가 아니라 싶어 믿고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더군다나 마치 자식 집에 마늘 걱정하시듯 그렇게 해주시니 당장 실행하지 않으면 왠지 송구스러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마늘을 부었다. 있지 않은가. 빨간 망사에 담겨 있는 마늘들 말이다. 그리고 그 돗자리 위에 철퍼덕 앉아서 마늘을 일일이 쪼갰다. 말이 쪼개는 것이지 거의 마늘을 까는 수준이었다. 처음엔 약간 힘들었는데 길이 나고 나니 재미있기까지 했다. "쩍 쩍" 벌어지는 마늘들이 시원시원하게 느껴지면서 '마늘 쪼개지듯 일이 잘 풀리면 모두가 신명날 거야'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다 보니 할머니의 말씀이 상당히 일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겉보기엔 멀쩡한 마늘들이 일일이 쪼개 보니 상하려고 하거나 상한 마늘이 종종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냥 뭉쳐서 걸어두면 십중팔구 상한 것이 전염되어 또 상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일 터. 이미 상했거나, 상하려고 하는 마늘들은 오늘이라도 당장 까서 냉장고에 보관해두는 게 수순일 것이다.

하여튼 앉아서 마늘을 일일이 쪼개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런 좋은 생활상식들, 말하자면 머리를 다치거나 발에 못이 찔렸을 때 된장을 바르는 것, 김치를 보관할 때 꼭 땅에 묻되 너무 깊게도 아니고 얕게도 아닌 적당한 깊이로 묻는 것, 창포로 머리를 감으면 냄새뿐만 아니라 소독도 된다는 것 등을 알고 있는 어르신들의 ‘삶의 지혜’가 묻히지 않고 잘 전수될 수 있을까'

다행히 뜨거운 햇빛이 비치진 않았지만, 한 낮이라 더위는 푹푹. 진하게 한판 끝내고 나니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다 쪼갠 마늘을 양지 바른 곳에 널고 나니 옷에 땀이 흠뻑. 이 정도면 샤워는 필수. 할머니의 한 말씀에 착한(?) 제자는 단숨에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할머니 말씀대로 쪼갠 마늘들이 잘 생겼다.
▲ 쪼갠 마늘 할머니 말씀대로 쪼갠 마늘들이 잘 생겼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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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할머니는 강의 참 잘 하셨다. 강의료는 한 푼 받지 않고 오히려 깻잎도 주시며 강의한 것을 그 제자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실행에 옮겼으니, 그리고 그 한 말씀에 선조의 지혜가 전해졌고, 마늘 쪼개어 널었던 사람들의 귀중한 땀까지 흘렸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더아모(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은 경기 안성 금광면 장죽리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cafe.daum.net/duamo 이며, 본인은 이곳의 목사이다.



태그:#더아모의집, #송상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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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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