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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길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매번 그냥 지나쳤던 '조병화 문학관'을 들어서는 길은 농가에 인접해 있어서 그런지, 주위에 인가가 조밀하게 있었음에도 고즈넉했다.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문학마을에 위치한 조병화 문학관은 시인의 생전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학관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밤나무를 비롯한 감나무, 살구나무 등의 각종 유실수와 잘 정리된 화단의 꽃들이 먼저 반겼다.

 

이어 문학관 앞에 위치한 '편운제'라 이름 지어진 건물엔 알알이 열매가 실하게 박힌 담쟁이가 기둥을 따라 건물 외벽 천정까지 타고 올라가 바람에 살랑거리며 손님을 맞는다.

 

 

담쟁이의 마중을 받으며, 잠시 조병화 선생께서 생전에 손수 미리 쓰셨다는 묘비석 앞에 섰다. 그리고 묘비석에 새겨진 '꿈의 귀향'을 읽으며, 살아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세울 정도로 늘 죽음을 준비하며 사셨던 시인의 숨결을 느껴보았다.

 

꿈의 귀향- 조병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편운제 옆에 위치한 묘비석 아래는 맹문동이 가득 있었는데, 난 군락지인가 싶을 정도로 잎 빛깔들이 좋았다. 시인은 생전에 맹문동 차를 즐겨드셨는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봤다. 그렇게 편운제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시인의 대표시가 뭐였더라?' 고개를 갸웃하며 문학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굳게 닫힌 문학관 현관문에 관람이 허락된 시간이 화, 토,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까지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발걸음을 그냥 돌리려는데, 노랗게 익을 대로 익어 제 몸 하나 추스리지 못해 떨어진 살구열매가 향긋하게 코를 간질이며, 집주인을 대신하여 지나가던 객의 발걸음을 잡는다.

 

 

살구나무 앞에는 시인의 흉상이 있었는데, 그 흉상을 보며 다시 한 번 시인의 대표작이 뭐였더라 하고 골똘하게 떠올려 보려 했지만,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문단의 큰 어른으로 다작으로 유명하셨던 시인의 대표작을 떠올리려 해 봤지만 거듭 실패하고 있을 때,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객의 심통일까, 눈길 닿는 곳마다 떠오르게 하는 시가 있어서 그런가? 전혀 다른 시인의 시만 떠올랐다. 도종환의 '담쟁이'.

 

담쟁이-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접시꽃 당신- 도종환

-생략-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생략-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를 떠올린 탓이었을까? 군락을 이룬 것도 아니요, 화려함을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기묘하게 이어 눈에 들어온 접시꽃. 이럴 때 주객전도라고 하던가. '꿈'을 안고 사셨던 시인에게 죄송하지만, 문학관 주인의 시 대신 '접시꽃 당신'을 떠올리며 문학관을 나섰다.

 

언젠가 다시 찾을 때는 죽음을 준비하며 꿈을 안고 살았던 시인의 시 한 편쯤은 외울 수 있기를 바라며.

태그:#조병화,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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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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