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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한다. 아니다. 어차피 신문이란 원래 자신들의 색깔 아닌가? 그걸 탓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 이건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다른 곳을 보아도 어찌 이렇게 뛰어난 상상력의 시야를 펼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최근 보수언론이 촛불시위를 해석하는 지평은 대단한 상상력이다. 어떻게 '그것'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7월 2일자 <중앙일보>에 오병상 논설위원과 김종수 논설위원이 <시론>과 <시시각각> 코너 "거리로 나온 성직자들", "석양의 무법자"라는 글을 게재했다. 먼저 오병상 논설위원의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이다.

 

그의 논지는 간단하다. "사제로서의 정치참여가 올바른 것인가?" 물론 "아니다"라는 것이다. 물론 아닐 수 있다. 특히 중세 암흑시대에 그렇게도 종교가 설쳤던 그 만행을 굳이 종교재판과 십자가원정을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암, 아마도 '천상의 권력'이라는 권위는 속세를 너무나도 손쉽게 '피의 세상'을 만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제단의 행진을 십자권 원정과 결부하는 상상력의 천박함

 

그런데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7월 1일자 시청 앞 사제단에게 적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지상의 권력이 도무지 뭐 하나라도 있단 말인가? 사제단은 침묵했고, 단지 이 정부가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길 원했다. 그것이 모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이들의 미사와 거리행진이 아주 '십자군 원정'의 살육처럼 보였던 것 같다. 이건 도무지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서는 연결조차 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 문제는 사실 특정언론에 최소한의 양심을 요구하고 있다. 최소한 그러한 논지가 옳다면 천상의 권력을 통해서 2MB 정권을 찬양하고 촛불을 든 사람을 '사탄'으로 규정했던 그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그 천박한 '기도회'에 대한 입장표명이 훨씬 전에 있어야 했다. 무엇인가 현재의 사제단을 비판하고는 싶고, 그래서 고리타분한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들먹이는 것 같은데 이미 어불성설이다.

 

물론 그 상관관계 역시 고의적으로 다른 곳을 보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종교마저 거리에서 촛불을 들게끔 하는 이 시국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고 "종교마저 거리에서 촛불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는 무엇인가? 이유인즉 과거 군사정권시절에는 그들의 신념이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않기에 정치는 속인들에게 맡겨도 된다는 것이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상상력인가? 지금 신부들이 "저를 국회로 보내주시오!"라고 외치는가? 혹은 "다음 선거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당에게 한 표를 주시오!"라고 외치는가? 그들은 지극히 '속인'의 모습으로 정치인들에게 '잘 좀 하시오!'라고 단지 그들의 방식으로 말할뿐이다.

 

촛불시위를 '폭력'이라는 하나의 논리로 정의하려는 무지의 상상력

 

 

김종수 논설위원의 논지는 완전히 별나라다. 그에겐 작금의 사태가 '무책임한 자들-법을 어기는 시위참여자', '무능한 자들-시위대를 막지 못하는 공권력', '한심한 자들-국회 등원을 거부하는 통합민주당 의원들'이라는 삼분법으로 아주 '간략하게' 정리되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촛불시위 현장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아~ 물론 추정이다. 그럼 이렇게 수정하자. 계셨겠지만 뭐 의미 있게 주위를 둘러봤겐가? 하고 말이다). 촛불현장을 한 번이라도 색안경을 벗고 본다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아마도 '정의 내릴 수 없는 현장'일 것이다.

 

암~ 쇠망치를 둔 무식한 시위대도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시위대=쇠망치'라는 논리로 정립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시위대는 쇠망치를 든 사람을 말리는 사람, 쇠망치에 맞은 전경을 치료하는 사람,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 그리고 폭력이 싫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 인터넷 공간에서 그 행위를 질타하는 사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 현장과는 관련 없는 곳의 수만의 '일상의 참가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직접 보면 알겠지만 일상의 참가자 역시 쉽게 정의될 수 없다. 시위대의 방향을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는 사람, 들고 온 깃발이 너무 정치적이지 않은지 고민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춤추는 사람, 가족들, 연인들, 심지어 통닭에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까지 말이다. 그들은 다 다르다. 하지만 '고민한다'.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다 '끼니'를 때우지만 '다른' 메뉴를 먹는 것과 같다. 이들의 모습이 김종수 논설위원에겐 '무책임자들'이라는 5음절로 간략 정리된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학원강사 해도 되겠다.

 

민주당 의원들을 '한심한 자들'이라고 보는 것은 그의 자유다. 따지지 않겠다. 하지만 현재의 공권력을 '무능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그러니까 그의 말대로 시청 광장을 벗어나는 '순간' 깡그리 잡아 버리는 것이 '능력 있는 자'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일찍부터 부정한 <중앙일보>는 사실상 '폐간'해야 되지 않을까?

 

물론 상상력은 자유다. 오죽하면 68혁명 때는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가 외쳐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권력이 없는 자의 외침이다. 권력이 없는 자는 '상상력'이라는 도구를 빌려오지 않으면 마치 '정상'처럼 보이는 지옥의 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하지만 권력자의 상상력은 매우 위험하다. 촛불을 '사탄'으로 보기 위해 일상의 현장 하나하나를 '폭력'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상상력은 천박한 사고의 극치를 증명해 줄뿐이다.


태그:#중앙일보, #김종수, #오병상, #촛불시위,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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