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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시(詩) 가 자주 등장한다. 신문에도 거리에도 강의실에도 시를 읊는 소리가 들린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시 보급에 나섰다. 마산시는 5월에 시의 도시 선포식을 가졌고, 안산에는 시 공원이 조성된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부천 상동주민센터는 행복한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온 마을 사업을 시비(詩碑) 거리로 추진했다.

 

1908년 최남선이 잡지 <소년>의 권두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것을 기점으로 보면 2008년은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다. 현대시가 한 세기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불고 있는 시 열풍이 오래오래 불었으면 좋겠다. 거친 언어가 난무하는 요즘 시인들이 뿜어내는 정제된 시어를 통해 언어의 미학을 배웠으면 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언어를 탁월한 시적 언어로 탈바꿈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정끝별 시인이 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지부장 강정규)가 주관한  목요문학나들이 6월 작가로 초대되었다.

 

지난달 26일 부천 복사골문화센터 문화사랑 카페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정 시인은 ‘시가 말을 걸었다’라는 주제 강연을 했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소개하는 것이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7편을 들고 나왔다”며 시의 탄생 과정을 꼼꼼히 짚어주었다.

 

그는 “20대에 처음 시 쓰기를 시작해  25년 동안 시를 써 오고 있지만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한 숙제다. 그러나 이런 순간을 경험하다보면 ‘맞아, 바로 이거 다’라는 감이 올 때가 있다”고 귀띔했다.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는 시인은  그 시기가  주로 방학이라고 했다. 방학 때는 집중과 몰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잠수의 깊이만큼 시적 깊이도 깊어진다고 설명했다. 깊은 잠수를 위해서는 숨을 참는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꾀를 부리면 몸이 물에 잘 잠기지 않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일수록 수심의 깊이를 빨리 깨닫지요. 저의 경우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자주 다니고 화집도 접하며 심신을 말랑말랑한 젤 상태로 만듭니다. 딱딱한 겔 상태에서는 기록갱신이 어렵습니다. 시인은 기록갱신을 하겠다는 오기와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어 “시인은 머리가 좋아야 한다. 그 머리는 학습능력은 아니다. 좋은 시인은 말하지 않는다. 건너뛰어도 이심전심으로 맑게 통하는 글을 쓰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시인보다 더 시답게 쓰는 사람이 많지만 삶 자체가 시의 텍스트나 시인이  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악 미술, 철학 등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본 화집에서 모티브를 잡아 1988년에 쓴 데뷔작 ‘칼레의 바다’를 소개했다. 1347년 영국군대가 칼레(프랑스)를 점령한 뒤 시민이 시의 열쇠를 가지고 와 사형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시인이 겪은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린 것. 광주항쟁에 관한 내용은 지금까지 많은 시인이 다루었다. 정 시인은 이 문제를 다른 시인과는 어떻게 다르게 쓸 것인가를 위해 깊은 잠수 끝에 칼레의 바다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도 과학이라고 정의한 그는 “문학은 시, 공간, 인물 등을 설정한 후에 과학적인 서술이 수반되어야 한다”며 유산의 아픔을 겪고 쓴 ‘옹관’을 소개했다. 여성의 자궁이 아이의 무덤이 되기도 한다는 데 착안해 옹관(甕棺)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풀이했다.

 

다음은 10분 만에 썼지만 독자들의 사람을 많이 받았다는 ‘밀물’.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이 시는 항해를 끝낸 두 척의 배가 항구에 무사히 정박한 것에 대해 서로를 위로하는 60자 정도의 짧은 시다.이 시를 두고 시인의 대표작이라 회자되기도 하는 것은 “그동안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먼 눈’을 쓸 때는 제목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단다. 눈을 소재로 한 많고 많은 작품과 차별화할 수 있는  장치 하나는 눈을 비릿하게 본 점이다. 생선에 비린내가 난다고 하면 산문이지만 생선에 향기가 난다고 표현하면 시가 되는 것처럼 순백의 눈에서 비린내가 나고 먼눈으로 설정한 것이 이채롭다.

 

시는  때로 '그 분'이 오셔야 잘 써지는 데 '먼눈'은  시인이 쓴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와 들려준 것을 그대로 받아적기만 했다고  고백했다. 기자가 취재원에게 꼬치꼬치 정황을 묻는 모습을 빗댄 ‘그만 파라. 뱀 나온다’도 소개했다.

 

정 시인은 “시인은 보통 사람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고통이 시인의 양식이다. 고통을 시로 승화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2시간의 강의를 마쳤다.

 

한성희 주부는 “목요문학나들이가 열리는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은 문학소녀였던 꿈이 되살아난다. 지금까지 73회가 열리는 동안 빠짐없이 참여해서 작가들의 문학세계를 접한 결과 내 안에 꿈틀거리는 시가 쏙 나올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태그:#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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