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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7일 17:05. ‘쾅! 퍽! 퍽!’ 지난 22년 동안 ‘북핵 위협의 상징’으로 미국 인공위성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던 북한 영변 핵단지의 냉각탑이 먼지를 자욱히 하늘에 날려보내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미국 강경파와 대한민국 수구세력이 말하는 세계에 보여준 정치 쇼일지라도 한반도가 비핵화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냉각탑 하나 폭파시키는데 미국은 250만 달러를 북한에 지불했다는 언론 보도는 분명 핵무기가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인민들에게 큰 관심거리뿐만 아니라 인류 전멸이라는 파괴성 때문에 주는 공포감은 전인류를 전율시킨다.

 

공포감과 전율은 사람들 머릿속에 만들어진 상상이 아니다. 1945년 8월 6일,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투하 이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가장 완벽하고, 잔혹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꼽히는 ‘원자폭탄’은 사람이 직접 경험한 일이기에 공포감과 전율을 상상을 초월한다. 경험된 산물이 인류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알려준 책이 있다.

 

2005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의 과학기술상을 수상했고, 2006년 BBC 4 새뮤얼 존슨 논픽션상 1차 후보목록에 오르기도 했던 다이애나 프레스틴 지은 <원자폭탄>(뿌리와이파리 펴냄)이다. 과학과 원자폭탄에 무지한 나 같은 사람도 역사가, 저술가, 방송인답게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구체적인 과학 스릴러물을 읽는 것처럼 긴박감으로 이끈다. 

 

부제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말하는 것처럼 마리 퀴리가 1898년 방사능이라는 현상을 처음으로 기술해낸 이후 그로부터 반세기 뒤1945년 8월 6일,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투하될 때까지 마리 퀴리부터 그녀의 뒤를 이은 러더퍼더, 하이젠베르크, 보어,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등은 이들은 학문에는 동지이면서 비판, 경쟁자였고, 삶에서는 동무였다.

 

"과학자들은 서로의 연구소를 오가며 연구했다. 미국인과 일본인이 독일을 찾아가기도 했고, 독일인들이 영국으로, 영국인들이 미국으로, 러시아인들이 프랑스를 찾아가 연구하기도 했다. 동료 과학자들은 서로 모여 스키도 타고, 소풍도 가고, 음악도 즐겼다. 국적이나 인종보다는 어디서 누구와 함께 연구했느냐에 따라 친목과 반목관계가 형성됐다."(13쪽)

 

하지만 이들이 히틀러, 처칠, 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정치가와 ‘조국’이라는 정치체제가 만든 전쟁을 만나면서 서로 변절하고, 비판하는 과정을 통하여 결국 사람이 사람에게 가장 잔혹한 원자폭탄을 투하할 수밖에 없는 비극을 낳게 된다.  

 

"핵분열은 원자력을 풀어내는 방법의 하나였다.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원자무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망명자들은 독일이 전례 없는 독보적 살상무기를 손에 넣어 전 세계의 복종을 강요할 없게끔 민주주의 국가들이 행동에 나서게 하도록 노력했고, 저마다의 개인적 사연들은 그 노력에 절심함을 더해주었다. 그들의 주장이 성과를 거두면서, 40년 이상 동안 계속되어왔던 개방적인 지식탐구의 형태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적국으로 갈려져 경쟁하는 형태로 바뀌고 말았다. 즉 서로 은밀하게 대규모 연구팀을 꾸려 연구하면서, 그 어떤 위험부담도 못된 짓도 마다않고 방해공작, 첩보, 정보공작 등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의 행보를 저지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15쪽)

 

결국 예수 변화(마태복음 17:1~8 , 마가복음 9:2~8. 누가복음 9:28~36)를 기념하는 축제일, 곧 빛의 축제일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는 태양보다 더 찬란한 빛을 발하는 리틀보이가 히로시마 하늘에서 떨어졌다.

 

리틀보이가 떨어진 순간 기타야마 후타바는 축축한 얼굴을 문질러보니 피부가 벗겨졌다. 공포에 질려 그녀는 피부가 벗겨진 채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틀비틀 지나갔으며, 사방이 가득한 살 탄 냄새가 흡사 마른오징어를 구울 때 나는 냄새 같았다고 한 의사는 말했다.

 

원자폭탄은 처음부터 잔혹함과 파괴성을 목적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마리 퀴리가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라듐'을 밝혀 낸 후 마리 퀴리와 그녀 남편은 라듐을 1903년 초 방사능요법에 사용하여 암, 피부병인 루프스, 혈관종, 다래끼까지 치료에 사용한다. 떼 돈을 벌 수 있는 퀴리 부부였지만 "라듐추출공정에 대한 특허를 얻지 않기로 생각했다.

 

상업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과학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즉 지식은 만인에게 공유되어야"는 연구 성과물로 인민을 위하여 쓰임받기를 원했을뿐이다. 과학을 상업주의에 팔지 않았던 퀴리부부가 50년 후 인류 전체를 파괴로 몰아가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은 탐욕과 정치권력과 민족주의는 전쟁과 손을 잡으면서 퀴리부부의 업적을 뒤로하고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를 떨어뜨려 14만 명을 핵 방사능으로 죽였고, 이후 인류는 핵무기 공포에서 하루도 평안하게 쉴 수 없게 되었다.

 

원자폭탄이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투한된 것이 인종주의라는 말도 있다. '팜홀'(독일과학자들을 억류한 장소) 책임자인 리트너 소령은 독일 화학자인 오토 한에게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었을 때 "우리가 두세 사람의 영국인이나 미국인을 구할 수 있다면, 10만 명이든 15만 명이든 일본 놈들이 죽는 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폭탄을 떨어뜨린 거지요."라고 말했다.

 

인종주의가 아니라 독일에 투하되었을지라도 원자폭탄의 잔인함과 파괴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63년이 지난 히로시마는 평화 도시가 되었고, 시민들은 활기가 넘친다. 인구는 1945년 8월 인구보다 세 배 이상 많다. 겉으로 보기에 분명 히로시마는 63년전 악몽을 말끔히 씻었다.

 

우리는 아직 이르다.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무엇이 있다. 원자폭탄 투하 도시에서 활기넘치고, 평화라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도시 히로시마 이지만 아직 그 고통을 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시민들은 삼각주에 의해 분리된 손가락 모양의 땅들을 이어주고 있는 수많은 다리 위를 오가며 일터로 가느라 부산을 떤다. 그러나 히로시마는 기억하고 있다. 그 아래 지역이 바로 원폭의 폭심이었음을. 그때 사라진 사루가쿠초 지역은 지금은 평화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청동으로 만든 ‘폭풍 속의 모녀상’ 같은 기념물들은 히로시마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또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히로시마로 끌려와 원폭으로 희생당한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을 기리는 기념물도 있다." (525쪽)

 

평화는 아직 멀다. 아직도 수많은 핵무기가 인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원자폭탄>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탐욕 때문에 과학을 자본에 팔고, 정치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과학을 파는 순간 언제든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핵무기가 히로시마 리틀보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잔혹함과 잔인함을 통하여 인류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음을 순간마다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원자폭탄>-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ㅣ다이애나 프레스턴 지음 ㅣ 류운 옮김 ㅣ 뿌리와 이파리 펴냄 ㅣ 28,000원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 마리 퀴리에서 히로시마까지

다이애나 프레스턴 지음, 류운 옮김, 뿌리와이파리(2006)


태그:#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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