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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예산의 1/3 가량 지원받은 성균관

 

 서울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는 명륜당
서울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는 명륜당 ⓒ

조선에도 법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治外法權) 지대가 있었다. 대사관을 비롯한 외국공관이 없던 시절에 무슨 치외법권 지대란 말인가.

 

그것도 임꺽정이나 장길산(張吉山) 등의 도적이 횡행했던 구월산 같은 오지가 아니라 도성 문을 열고 나와 야트막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노릇이다.

 

게다가 그곳이 성균관(成均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더욱 놀라울 것이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조선을 이끌 인재를 기르는 성균관이 설마 불법집단과 적절치 못한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아무렴 세자까지 입교하여 사사 받는 성균관이 그런 의혹을 받을 수 있겠는가. 문제의 집단은 성균관 아래에 있는 반촌(泮村)이라는 마을이다.

 

조선에서 성균관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했다. 건물의 규모도 거의 궁궐에 맞먹었으며 실제로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했는데, 반궁은 조선이 추앙하는 주나라가 세웠던 학교의 명칭이었다. 성균관은 나라의 전체 예산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를 배당 받을 정도였다.

 

과거의 첫 단계인 소과(小科, 초시初試라고도 함)를 통과한 전국의 수재들이 성균관에 입교하여 대과에 급제하기 위해 용맹전인하였다. 그들 뿐 아니라 자체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를 거친 이들과 높은 관리의 자식들이 유생(儒生)으로 입교하였는데, 수효가 모두 2백 명이나 되었다.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유생들에게는 무엇이든 최고를 제공해야 했다. 식사부터 잠자리까지 조금의 불편함도 없어야 했으며 용돈도 충분히 줘야 했다. 유생들의 수발을 들 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했는데 그들을 반인(泮人)이라 하였다. 궁궐에 딸린 자들을 궁인이라고 하듯 반궁에 딸린 자들을 반인이라 불렀으며,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반촌이었다.

 

개경 언어와 습속 지키며 혼인도 자기들끼리 해

 

반인들은 성균관의 모든 잡일을 맡았으며 모든 것이 통제되는 기숙사에 묵지 않고 반촌에서 통학하는 유생들을 수발해야 했다. 반인들은 조선에 살고 있되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이 천도하였을 때, 개경에 있던 국자감(國子監)의 후신도 한성으로 옮겨야 했다.

 

고려의 반궁에 딸려 있던 반인들도 딸려 와야 했는데, 그 이후 반촌은 외부와 차단되었다. 반인들은 개경의 언어와 습속을 지키면서 혼인도 자신들끼리 했다. 스스로 자신들을 고립시킨 그들은 외부에서 정한 법과 규정을 적용받지 않으려 했다.

 

그들이 자주 저지르는 범죄는 도벌(盜伐)이었다. 조정에서는 한성 일대의 숲을 엄격히 보존하려 했다. 지엄한 왕실과 조선을 움직이는 두뇌가 담긴 한성을 가급적 쾌적하게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성 주변 십리를 '벌채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함부로 나무를 베는 자는 크게 처벌하였는데, 반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를 베었다. 도벌을 하다가 들키면 유유히 반촌으로 들어갔다. 순라군들이 반촌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현행범을 목격한 순라군이 들어가지 못하는 반촌은 치외법권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반인들이 대담하게 된 것은 그들의 직업과 관계가 있다. 반촌은 도성에서 소비하는 쇠고기를 책임지는 곳이기도 했다.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를 함부로 잡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지만 성균관 유생들의 식탁에 오르는 용도는 허용했다. 그에 따라 성균관을 수발하는 반인들은 백정도 겸해야 했다.

 

합법적으로 소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곳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소를 잡을 수 있는 곳은 반촌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촌은 언제나 정해진 분량 이상을 도축해 반출했다. 어차피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지 않은가. 쇠고기는 언제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했다. 조정 대신들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들도 쇠고기를 먹어야 했으며, 대부분 반촌의 고객이었기 때문에 굳이 문제 삼지 않으려 했다.

 

어려서부터 불법에 익숙하고 칼을 쓰는 도축에 종사하던 반촌의 사내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도성 인근의 내로라하는 무뢰배들도 반촌과 충돌하기를 꺼렸다. 반촌이 강하기도 하였지만 워낙 인맥이 든든한 탓이었다.

 

생각해보라. 현임과 은퇴를 막론하고 반인들의 수발을 받지 않은 관리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 않은 자를 찾는 게 훨씬 빠를 터였다. 반인들과 충돌하여 포도청에 끌려갔다가는 일방적인 판결을 받고 혼쭐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반인들은 더욱 좋은 쇠고기를 저렴하게 바치는 것으로 보답하였을 것이니 아예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저런 이유로 반촌은 외부와 더욱 고립되었다.

 

반촌이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본질적으로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먹을 것 걱정 없이 사는 것은 성균관 덕택이 아니던가. 자신들의 밥줄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인의 유입을 차단해야 했을 것이었다.

 

모든 가능성 원천봉쇄된 서글픈 마을

 

반촌의 사내들은 일찍 사그라졌다.  바깥 상민의 자식들이 일찌감치 포기와 체념을 배우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에 비해 반촌은 그렇지 않았다. 철이 든 다음부터 사내들은 두 부류로 분리되었다. 묵묵히 성균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소를 잡는 일에 전념하는 측과, 술과 폭력, 도박으로 소일하는 측으로 나뉘었다.

 

반촌의 힘이 강하여 외부인들이 두려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었다. 하찮게 여기던 상민의 자식들이 돈을 벌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반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성균관에 붙어살며 소나 잡는 천역(賤役)들에게 바람직한 기회가 주어질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과거의 응시는커녕, 모든 가능성이 원천봉쇄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반촌의 사내들은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다.

 

현실에 어긋난 자들이 바깥으로 나가 술과 도박, 폭력을 영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서슴없이 살인까지 저지르는 자들까지 나타날 지경이었는데, 외부와 물꼬가 트여있지 않은 반촌의 서글픈 자화상이기도 했다. 반촌은 그렇지 않은 자들이 유지해 나갔다.

 

갑오경장, 성균관과 반촌의 목줄까지 끊어

 

반촌은 성균관과 운명을 함께 했다. 고종 31년(1894) 7월 초에 반포해 신분제도와 과거제도를 철폐한 갑오경장(甲午更張)은 반촌의 용도까지 폐기해버렸다. 이전부터 과거가 극도로 부패하여 성균관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졌지만, 갑오경장의 칼날은 그나마 근근이 유지하던 성균관과 반촌의 목줄까지 끊어버렸다.

 

반촌의 용도는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았다. 반인들은 반촌에 남아 소를 잡아 생활했다. 갑오경장 이후에도 쇠고기의 수요는 여전했기 때문에 생계는 그리 궁색하지 않은 편이었지만 세인(世人)들은 반촌을 달리 대하지 않았다. 반인은 백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으며, 성균관이 사라진 다음에는 진짜 백정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반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근대적인 교육이 도입된 세상에서 이전에 없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제는 반인의 자식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여염의 자식들과 합법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백년에 이르도록 성균관을 수발했던 반인들은 교육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합을 만들어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배움에 한이 맺힌 반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똘똘 뭉쳐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했으며, 자식들도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 했다.

 

교육의 힘, 누구보다 잘 알아...미래 준비에 힘써

 

반촌에서 태어난 마지막 세대는 더 이상 소를 잡을 이유가 없었다. 사회 각계각층으로 빠르게 진입하는 자식들에게 반촌은 기꺼이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미래는 언제나 준비하고 대비하는 자의 몫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반인들은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30년 정도가 흐르자 반촌은 완전히 사라졌다. 반인의 후예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몇몇 남은 그들마저 사라졌을 터였다. 조선의 해방구이자 갈라파고스였던 반촌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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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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