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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경제학부가 마르크스경제학자 1명을 용인하지 못할 정도로 옹졸하지 않다." 서울대 경제학부의 유일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이던 김수행 교수 정년퇴임이 코앞이던 지난해 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 말이다. 노교수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것일까. 경제학부 교수회의는 작년 2학기에 이어 이번에도 마르크스경제학자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지난 2월, 균형 잡힌 학문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를 33명의 교수 중 1명으로 임용할 것을 호소했던 '학문의 균형과 비판 정신의 복원을 바라는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이 경제학부 스스로 왼쪽 날개를 꺾은 것을 규탄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말]
지난 2월 18일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 70명이 학내에 붙인 '학문의 균형과 경제학에서 비판 정신 복원을 위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를 채용하라'는 호소문. 그러나 이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2월 18일 서울대 경제학부 대학원생 70명이 학내에 붙인 '학문의 균형과 경제학에서 비판 정신 복원을 위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를 채용하라'는 호소문. 그러나 이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6월 11일에 열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회의는 2학기 신임 교수 채용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올해 2월에 정년퇴임 한 김수행 교수의 후임으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를 선발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대학원생들의 목소리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결정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사실이었다.

올해 3월 신임교수 채용 공고가 나기 전,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에 대한 요구는 지도교수의 퇴임을 앞두고 있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경제학부 대학원생들뿐만 아니라, 서울대 학부생과 졸업생, 진보적 학계 등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교수연구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후임 채용을 호소하는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대부분의 교수들은 답변을 회피하거나 '신임 교수 채용은 교수들의 고유 권한'이라며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 일반(정치경제학 포함) 2명'이라는 신규 교수 채용 공고를 낸 것은 학내외의 여론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면피용'이었던 셈이다.

탈락 이유=외국 학술지 게재 실적 부족? 그럼 현직 서울대 교수들은?

언론 보도에 따르면, 11일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장이던 이영훈 교수는 "공개 채용에 지원한 정치경제학 전공자들이 여러 측면에서 채용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채용이 무산되었고, "다음 학기에도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를 선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신규 교수 임용에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들은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중진 학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선발과정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채용 기준이란 무엇일까? 한국의 일부 주류경제학자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외국 유명 학술지 게재 실적이 모자랐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런 기준으로 따지자면, 현재 서울대 경제학부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들조차 상당수가 그 기준에 미달하고 있으며, 주류경제학 분야의 신임 교수 채용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더욱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마르크스경제학 분야의 논문이 게재될 수 있는 학술지의 수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번에 지원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은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신임 교수 임용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주류경제학 전공 교수들의 대부분이 마르크스경제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동시에 적대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번 결정이 내려진 더 솔직한 이유일 것이다.

33분의 1도 용납 못하는 서울대 경제학부, 20년 전으로 퇴행

마르크스경제학은 자본주의가 결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조화로운 경제 체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계급사회, 착취사회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자본주의는 결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경제 체제도 아니며, 오히려 자체적인 성숙과 발전의 결과 끊임없이 주기적 공황과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경제학은 자본주의가 영원불변한 경제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 주류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사적 개인이 본래부터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체제의 산물이며, 오직 그 체제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이 다른 누군가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닌 자기 자신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로 해방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따라서 마르크스경제학은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비판자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의 안녕과 조화를 신성시하는 주류경제학의 시각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이단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일찍이 간파한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 서문에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에는 사리사욕이라는 복수의 여신이 자유로운 과학적 연구를 저지하는 투쟁 마당에 들어오게 되며", "영국의 국교가 그 신앙조항 39개 중 38개를 침해하는 것은 용서할지언정 그 수입의 1/39을 침해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말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서울대 경제학부는 전체 교수 정원 중 1/33을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가 침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경제학 후임 교수의 채용을 요구한 대학원생들은 학문의 균형과 비판 정신의 복원을 위해 다양한 학문과 사상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류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방법론 이외에 다른 경제학이 학문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서로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섰을 때는 결국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20년 전 김수행 교수의 채용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 힘의 논리에서 우세를 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원생들의 반 이상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들이었으며, 이들은 마르크스경제학이 갖는 의미를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이해했고, 지식인의 학문과 실천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말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몰아닥친 사회 전반에 걸친 보수화는 불가피하게 마르크스경제학의 현실적 의의를 퇴색시켰고, 어느 사이엔가 마르크스경제학은 자본주의 사회와 주류경제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아닌 경제학의 여러 전공 분야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20년 전 대학원생들의 힘에 밀려 한 사람의 마르크스경제학자를 교수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주류경제학자들은, 당연하게도 이제 일개 전공 분야로 되어버린 마르크스경제학을 무시하기로, 공식적인 학문의 영역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은 결국 힘의 논리에서 패배한 것이다. 2008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이 김수행 교수가 채용되었던 1988년에 비해 마르크스경제학을 결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주류경제학의 마르크스경제학에 대한 태도는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은 결국 마르크스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우리들이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지난 2월 정년퇴임을 한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 김 전 교수는 33명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 유일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였다.
 지난 2월 정년퇴임을 한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 김 전 교수는 33명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 유일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였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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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 마르크스경제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서울대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은 전공 교수를 갖지 못했던 20년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서울대 경제학부가 전공 교수를 뽑지 않았다고 해서 마르크스경제학이 사라질 리는 없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근로인민들을 갈수록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주류경제학이 제공하는 설명이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제학도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으며, 그들은 여전히 마르크스경제학으로부터 답을 구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은 극악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질식되고 있던 대학 사회에까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전파하는 기폭제가 되었던 1987년을 닮아가고 있다. 미친 쇠고기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제 민영화와 대운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고 있으며, 더 이상 노동자들의 파업이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닫고 있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이러한 일들이 왜 발생하며, 어떻게 해야 동일한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비판의 무기로서 이론은 그 자체로는 힘을 가질 수 없지만, 대중의 이해와 지지를 얻은 이론은 현실적인 힘을 갖는다. 대중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한, 마르크스경제학은 비판의 무기가 아닌 무기의 비판으로서 조만간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태그:#마르크스경제학,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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