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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2주간 휴가를 내고 시골에 매실을 따러 가셨다. 지난해 까맣게 그을려 돌아온 아버지가 조금 안쓰러웠던 기억이 난다. 보지 않아도 없는 일손에 혼자서 두 사람 세 사람 몫을 너끈히 하고 돌아온 것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골의 맑은 공기와 좋은 물 덕분인지 더 건강해 보이고 수확의 기쁨으로 충만해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머금고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매실나무가 점점 자라서 수확량도 늘어갔다. 해서 올해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생과 함께 매실 따기에 동참했다. 하룻밤 자고 나니 친구 하나가 '오랜만에 수영을 했더니 팔다리가 아프더라'는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바로 이런 기분이군' 하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향긋한 청매실
 향긋한 청매실
ⓒ 정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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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본 매실밭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계단식으로 층층이 올라가며 향긋한 매실나무가 총총 심어져 있었다. 매실나무는 키가 작아서 우선 눈높이의 매실부터 땄다. 낮은 부분은 허리를 숙여 따고, 팔을 뻗쳐도 손이 닿지 않는 눈높이보다 좀 더 높은 곳은 사다리를 이용했다. 손이 조금 더 컸더라면, 키가 좀 더 컸더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이 따고 싶은 욕심에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생겼다.

매실을 열심히 따고 있는 나
 매실을 열심히 따고 있는 나
ⓒ 정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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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나무의 가지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다행히 날씨도 그리 덥지 않아 작업하기에 수월했다. 짧은 시간 동안 되도록 많이 따기 위해서 열심히 매실을 땄다. 그러다 보니 장갑을 끼고, 토시를 해도 손목과 토시 사이에 틈이 생겨서 나뭇가지에 그인 영광의 상처도 몇 군데 생겼다. 아픈 줄도 모르고 그렇게 열심히 매실을 땄다.

농가의 일은 얼마나 바쁜지 퇴근 개념도 없고, 커피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없었다. 잠시 쉴 틈이 나면 허리를 펴고 눕는 게 먼저였고, 참을 먹는 시간에도 참만 먹고 곧바로 일어나 매실을 땄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다 왔다.

탐스러운 청매실
 탐스러운 청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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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을 따며 '무아지경'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매실을 따기도 했고, 농가의 일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힘든 작업을 사람들이 모두 마다한다면, 아마도 매실청을 먹을 일은 영영 없어지겠지. 사람들이 편한 일만 좇는다면, 그래서 벼농사 짓는 사람도 없어지고, 매실농사 짓는 사람도 없어지면 우리는 그런 식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해 살아야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석유는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에 한 방울도 나지 않으니까 그렇다 쳐도, 우리가 먹을 식량마저 수입해야만 되는 지경에 이른다면 얼마나 비극일까.

우리는 시장에서 수입산인지 국내산인지 표기가 안된 농산물을 사 먹을 때가 많다. 나는 우리 농산물이라고 믿고 싶은데, 가격이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들면 혹시 수입산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수입산이 뭐가 그리 나쁘다고 호들갑인가?'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답하면 좋을까. 똑같은 작물이라도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땅에서 나는 게 아무래도 우리 몸에 이로울 것이다. 배를 타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오려면 당연히 시간이 많이 걸릴 테고, 상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약물이든 더 쳐야 되는 게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런 농산물이 우리 몸에 이로울 리 만무하니까.

한 켠에 쌓인 장작은 난방용. 기름과 장작을 겸해 난방을 한다니 친환경적이다.
▲ 시골집 한 켠에 쌓인 장작은 난방용. 기름과 장작을 겸해 난방을 한다니 친환경적이다.
ⓒ 정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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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도 해보고, 매실도 따는 등 농가의 일을 몸소 체험하고 나니 비로소 나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농민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뜨거운 햇살을 등지고 구슬땀 흘려 농사지어 손해 보지 않고, 일한 만큼 적당하게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겠다.

가격 경쟁력에 밀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도록 농가를 보호할 대책도 시급하다. 농사를 지어서도 충분히 자식 교육시키고 빚지지 않도록 다른 어떤 산업보다 우선시되고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나 정책들이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청년 실업자가 넘쳐 나는 세상, 어쩌면 농업이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대학 도서관에 가보면 대부분 공무원 수험서나 토익책이 펼쳐져 있다. 살인적인 경쟁률 속을 뚫고 들어가려 아등바등 살지 말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볼 수는 없을까.

농사지어 큰 부자는 될 수 없겠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 적어도 인생이 피폐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고, 맑은 자연과 벗하며 살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지 않을까. 도시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한갓 꿈에 불과한 말처럼 들리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필요한 지도 모를 일이다.

크기별로 매실을 선별해주는 기계
 크기별로 매실을 선별해주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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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골집에 가니 창고도 하나 새로 생겼고, 매실을 크기별로 선별해주는 고마운 기계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는 이 기계가 너무나도 신기했다. 털이 달려 있어 매실을 털어주고, 작은 것부터 아주 큰 것까지 선별해주는 이 기계를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수확한 청매실, 상자에 담겨 주인을 찾아간다
 수확한 청매실, 상자에 담겨 주인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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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한 매실은 이제 상자에 담겨 제 주인에게 팔려갈 것이다. 일년 내내 잡초를 뽑고 비료도 주고 매실나무를 키운 할머니나 아버지는 이 매실들이 아마도 자식 같지 않을까.

여름철, 배탈이 났을 때 매실이 효과가 좋다고 한다. 매실 진액을 담아 여러가지 설탕이 필요한 요리에 대신 넣어 먹거나 매실 주스를 만들어 먹으면 좋다. 전통찻집에서도 매실차를 마셔봤지만, 역시 우리 집에서 담은 진한 주스에 얼음을 동동 띄어 먹는 것보다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집집마다 매실 진액을 안 담는 집이 없을 정도로 매실 진액 담기가 보편화된 걸 실감한다.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는 청매실, 올여름에 담은 매실 엑기스로 가을에는 매실 장아찌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생각만큼 맛있는 장아찌가 될지 미지수지만 도전해보는 데 의의가 있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지만 산세가 아름다운 시골, 꼬불꼬불한 시골길에 아스팔트가 놓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지만 산세가 아름다운 시골, 꼬불꼬불한 시골길에 아스팔트가 놓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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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골에 가서 맑은 공기를 양껏 마시고 왔더니 개운하다. 있는 동안 복식 호흡을 열심히 하고 왔다. 이렇게 공기 좋은 데 살면 감기 같은 건 안 걸리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도시 생활에 진력이 나면 언젠가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에서 살 날도 오리라. 휴대폰도 터지지 않지만 산세가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서 이틀 동안 자연인으로 거듭난 일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태그:#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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