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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현아 이리 와 봐."
 
이영미(38·여)씨가 아홉 살 여자아이를 손짓하며 부른다. 영미씨는 아이의 머리에서 분홍색 토끼 핀을 빼 내어 단정하게 다시 꽂아 준다. 두 손으로 아이의 옷을 털어 매무새를 다듬어주고는 친구들 틈으로 돌려보낸다. 여느 엄마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는 다현이의 친엄마가 아니다. '학원 엄마'다.

 

지난 5월 28일 인천 송도신도시 L영어학원에서 상담교사 이영미씨를 만났다. 그녀의 자리는 학원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데스크. 영미씨는 그 자리에서 200여 명의 학원생과 학원을 오가는 모든 사람을 맞이한다.

 

오후 1시 50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그레이스 쌤(이영미씨의 영어이름)! 쟤 엘리베이터에서 뛰었어요."

"그레이스 쌤! 사탕 한 개만 주세요."

 

아이들은 영미씨에게 친구를 고자질하고, 학교에서 생긴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하고, 간식을 달라고 조른다. 진짜 엄마에게 하듯 그 모습이 무척 자연스럽다.

 

'그레이스 쌤'은 바쁘다. '상담교사'는 편의상의 호칭일 뿐, 그가 하는 일의 절반도 포괄하지 못한다.

 

"그냥 총괄이라고 보시면 되요. 학생 관리하고, 강사님들 스케줄 관리하고, 어머니들 오시면 상담하고, 학원비 수납하고 경리 보고, 청소하고 설거지해요. 작년에는 차량 도우미(학원차 타는 아이들 보살피는 일)도 했었는데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했어요."

 

영미씨는 왜 이 일을 선택했을까.

 

"3년 전에 알림방(구인신문)보고 지원한 거예요. 이혼하고 애 둘 데리고 살려다 보니 그나마 괜찮은 직장 같았어요. 오전 11시 출근이라 아침에 여유가 있거든요. 애들 밥 먹여 학교 보내고 집안일 하고 출근하면 딱 맞아요. 워낙에 애들 좋아하는 성격이라 걱정 없이 시작했고…. 지금은 그만두고 싶어도 애들(학원생들) 때문에 못 그만둬요."

 

토한 아이 닦아주고 약 챙겨주고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냐고 물었다.

 

"유리라고 7살짜리 애가 있었어요. 우리 딸 수정이랑 많이 닮아서 예뻐했어요. 올 2월에 그만뒀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고…. 찬우도 기억나요. 몸이 비실비실해서 자주 아팠어요. 어느 날엔가 학원 문 앞에다 토를 한 거예요. 애가 얼굴이 허옇게 질렸길래 눕히고 토한 거 다 닦고 약국에서 약 사다 먹였어요."

 

상사와 동료도 이영미씨의 모성에 놀라워한다. 학원장 한아무개(45·여)씨는 "원래는 전화 받고 경리일하는 분으로 시작했는데, 워낙 성실한 성격이라 상담이랑 이것저것 믿고 맡겼죠"라며 "저런 분 구하기 쉽지 않아요, 경영자 입장에서 많이 고맙죠"라고 말했다.

 

동료 교사 윤아무개(28·여)씨는 "오가는 사람 살피는 게 상담교사일이긴 하지만 그레이스 선생님은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 타고나신 것 같아요"라고 칭찬했다.

 

까다로운 학부모는 없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는 못 해요. 열 명 중에 한 분 정도? 학원 차에서 장난치다 안 내려서 수업을 못 들은 학생이 있었어요. 그 어머니가 전화로 불평하시고, 학원까지 오셔서 화를 내셨어요. 앞 뒤 사정도 들어봐야 하는데 화만 내셨죠. 짜증났지만 저도 애 엄마니까 그 입장 알잖아요. 마음부터 풀어드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했죠."

 

직장을 옮겨볼 생각은 없었을까.

 

"당연히 그런 생각하죠. 저는 가장이에요. 페이가 중요해요. 2년 반 동안 월급 인상 한 번 없었어요. 올해 들어서 10만원 올라서 120만원 받고 있어요. 애들도 커 가고 그거로는 부족해서 주말에는 다른 일을 다녀요. 사업을 하든지 해서 안정적으로 살아야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에요."

 

10년 간 영어 학원 교사를 하다가 지금은 자신의 학원을 운영하는 전미(40·여)씨는 "상담교사의 역할은 학원생들을 잘 챙기고 학부모에게 친절한 상담을 해주는 것이므로 다정다감한 성격이 필수요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미씨는 "학원생이 300명이 넘는 대규모 학원이나 기업형 학원은 분위기가 다르다"면서 "전문 상담교사를 채용하는데, 페이도 훨씬 세고 전문적인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돌봄노동에 기대는 사교육 시장

 

학원생이 적은 중소형 학원은 이영미씨처럼 사무보조와 학생관리를 겸할 수 있는 상담교사를 채용하길 원한다. 인터넷 채용사이트 잡코리아에는 현재 750여 건의 학원 상담교사 구인 정보가 올라와 있다.

 

대부분 학력, 나이, 성별 제한이 없고 연봉은 1400만~1600만원 선이다. '주부를 선호'한다거나 '아이들을 좋아하고 친절한 성격인 분을 모신다'는 우대조건이 붙은 게시물이 상당수였다. 상담교사직이 엄마 역할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돌봄노동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영미씨는 일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70~80% 정도'라고 답했다.

 

"불만도 있지만 아이들이 참 좋아요. 제 생일을 어떻게 알고 선물과 케이크를 사 온 4학년 친구가 있었어요. 스승의 날에 편지와 꽃을 주는 아이들도 있구요. 그럴 때 가장 보람을 느끼죠."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준 학생은 없었냐고 물었더니, "하하,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네요"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저를 엄마로, 이모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학원을 집 같은 분위기로 만들고 싶어요. 그럼 아이들도, 어머니들도 편안해 하지 않을까요? 이 일 계속하는 한 아이들을 자식처럼, 조카처럼 생각할 거예요."

 

인터뷰 도중에도 아이들은 밀물처럼 들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영미씨는 학부모에게 차를 대접하고 전화를 받고 아이들을 챙기며 틈틈이 인터뷰에 응했다. 한 번에 여러 일을 척척 해내는 그의 모습은 슈퍼우먼 같았다. 경쟁을 강요하는 사교육 시장에서 만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학원 상담교사#돌봄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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