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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순 무렵, 호주 TV 뉴스를 시청하다가 낯익은 풍경이 나와 본능적으로 몸이 앞쪽으로 기울었다. 청계천에서 벌어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뉴스가 나왔기 때문이다. '서울의 촛불 시위(candle-lit protest in Seoul)'라는 자막과 함께.

 

현장을 보도한 TV 카메라는 앳된 10대 소녀들이 촛불을 들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오랫동안 비추었다. 언뜻 보기에 시위 장면 같지 않고 축제 마당 같았다. 무엇보다 평화로웠다.

 

그런데 뉴스 진행자가 촛불 시위 참가자의 60% 정도가 중·고등학생이라는 대목을 다시 언급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행간에서 '왜 학생들이, 그것도 밤중에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 나섰을까?'라고 묻는 것처럼 읽혔다. 그런 표정이었다.

 

한국 10대의 촛불 시위 참가에 고개 갸우뚱거린 호주 앵커

 

우연이었을까. 촛불 시위 뉴스에 이어진 호주 국내 뉴스가 요즘 한창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호주 10대들(이른바 Z세대)의 음주 행태였다. TV 화면 가득 담긴 댄스파티 현장은 청소년들로 가득 차서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았다.

 

거리 풍경은 한 술 더 떴다. 곤드레만드레 취해버린 10대들이 비틀거리고 토하고, 더러는 뒤엉켜 싸우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면서 청소년들이 가득 탄 자동차가 고속으로 질주하는 모습이 나왔다.

 

최근 호주 통신(aap)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호주에서 발생하는 청소년 폭력 사건의 47%가 무분별한 음주에서 비롯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청소년 사망 사고 원인 중에서 교통사고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데 이 역시 음주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의 촛불 든 10대와 호주의 술병 든 10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뉴스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어떤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한쪽 방향으로 일반화하는 건 위험하다. 물론 그날의 뉴스를 시청하면서 '한국 10대는 전부 촛불을 들었고, 호주 10대는 전부 술병을 들었다'는 식으로 오해할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한국 촛불 시위 연일 보도하는 호주 언론

 

아무튼 호주 신문과 방송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를 계속해서 보도하고 있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주로 AP, AFP, 로이터 등의 통신을 이용하지만, 호주 국영 abc방송은 북아시아 특파원의 현지 보도를 내보내거나 호주의 한국 전문가와 대담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히 촛불 시위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6월 초의 상황을 abc방송 쉐인 맥리오드 특파원은 "촛불 시위대는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머리를 조아린(kowtowing) 것을 비난했다"고 보도했다.

 

맥리오드 특파원은 'The World Today' 프로그램 리포트를 통해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과 관련하여 4년 이상 수입 금지되고 있는데, 이명박 정부가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최종 수순을 밟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수입 재개에 합의했다"고 보도하면서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결정에 분노한 시위대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한국 상황을 전했다.

 

그는 이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의 내용을 확정하고 행정안전부에 관보 고시를 의뢰했다'는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5월 29일 발표를 상세하게 전한 다음에 "시위대 숫자가 자꾸 늘어나는 두 가지 이유는 첫째,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결정과 발표를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에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 나라인 일본, 대만 등과 달리 수입 소 연령 제한을 느슨하게 했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호주 특파원 "미국에 머리 조아린 이 대통령"

 

쉐인 맥리오드 특파원은 시위 현장을 스케치하면서 "수만 명의 시위대가 1주일 넘게 모이는 서울 중심가에는 어린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이 있으며, 특히 시위대는 미국에 머리를 조아린 대통령을 강하게 질타했다"고 보도를 이어갔다.

 

맥리오드 특파원은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탄생한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허니문은 이번 촛불 시위로 끝났다. 최근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이점도 사라져버렸다"고 보도하면서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당 지지층까지 이탈하는 현상을 보인다"고 보도했다.

 

한편 한국이 호주에게는 세 번째로 큰 쇠고기 수출 시장이라는 점을 감안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영향 등을 호주 내에서는 조심스럽게 보도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와 달리 맥리오드 특파원은 "촛불 시위가 호주산 쇠고기 수출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수입 쇠고기 판매 가격이 소비자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축산 전문가의 말을 인용했다.

 

"호주 축산 전문가들은 한국에 미국산 쇠고기가 다시 수입되면 지난 4년 동안 크게 신장됐던 호주산 쇠고기 수출이 막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한미FTA가 개시되면 (호주산은 미국산과) 가격 경쟁에서 두 손을 들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의 한국 유입 문제, 조심스럽게 주시하는 호주

 

호주 언론이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뉴스를 조심스럽게 보도하는 것과는 달리, UTS대학교 브로닌 달튼 교수는 "미국산 쇠고기의 질이 나쁘다는 평판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호주 abc방송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달튼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 하락이 친미적인 보수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진보 세력의 목소리가 다시 등장하게 만들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허니문은 조기에 끝났다"고 논평했다.

 

달튼 교수는 "촛불 시위대가 이 대통령을 반대하는 정치 세력에게서 조종당한다고 생각하느냐?"는 프로그램 진행자 센 램의 질문을 받고, "과거 한국에 정치적 목적의 시위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지위를 잃은 지 오래"라고 답하면서 "다만 그들이 2008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한 보수 입법 기관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목소리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달튼 교수는 특히 미국산 쇠고기의 품질에 대해 "미국과 관세 장벽이 없어지면 한국에 값싼 미국산 쇠고기가 밀려올 것"이라면서 "아주 질이 낮은 쇠고기, 햄버거용 쇠고기, 살찐 젖소 고기가 수입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달튼 교수는 "한국 시위대가 이명박 대통령의 친미 정책을 반대하는 것으로 보느냐?"는 프로그램 진행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했다. 또한 그는 맥리오드 특파원과 마찬가지로 "이 대통령이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을 언급했다.

 


태그:#미국 쇠고기, #촛불 시위, #호주,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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