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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MT 란 말은 사실이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형태의 시위 현장이었다. 이곳이 시위 현장이란 것은 "이명박 물러가라", "어청수도 물러가라" 등의 구호만이 말해줄 뿐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반대 72시간 릴레이 농성 마지막 날인 7일, 서울시청 집회현장에 다녀왔다.

 

시청 잔디밭에 앉아있는 시민들은 야유회 하려고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 같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컵라면, 떡, 도시락을 먹는 모습, 돗자리에 빙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영락없는 야유회 풍경이었다. 애완견을 데리고 나온 시민도 있다. 털이 복슬복슬한 애완견은 여중고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도 조직된 선수(운동권)들이 아니었다. 깃발 들고 나타난 운동권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행진 선두에는 갖가지 모양의 피켓과 풍선을 들고 있는 고등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미친 소 미친 교육 완전쩔어"라는 알 수 없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완전쩔어'라는 뜻을 알기 위해 한 학생에게 다가갔더니 아래위를 훑어보며 "조선일보 아니죠?"라고 물었다. 결국 명함을 보여주고 조선일보 기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다음에야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완전쩔어'는 '기가 막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은어'였다.

 

미니스커트 차림 20대 여성들도 거리로 나왔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 중, "100일 됐으니 이젠 헤어지자"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미니스커트에 하이힐, 곱게 화장한 얼굴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100일됐으니 이젠 헤어지자"

 

 

시민들 반응에 적잖게 놀랐다. 행진대열이 종로를 돌아 시청까지 오는 종로2가 탑골공원을 지날 때, 수많은 노인들이 박수를 보내 주었다. 종로 일대에서 열린 많은 집회를 취재했지만 종묘공원 노인들이 박수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평소 같으면 젊은 것들과 멱살잡이라도 할 태세로 욕하고 손가질 하던 노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위대열에 동참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손자 손녀 뻘 되는 행진 대열 선두에 동참한 한 노인에게 "이명박 대통령 맘에 안드세요"라고 물었더니 "그러면 안되지! 병든 소 먹으라고 하는 대통령이 세상에 어디 있어?"라고 대답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도 시민들은 지지를 표시했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있는 한 시민은 행진하는 시위대를 향해 차창 밖으로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또, 경적을 울리고 손을 흔드는 자가용 운전자도 눈에 띄었다.

 

7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길거리 전당대회를 마치고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시민 약2000명이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시청까지 행진을 했다. 행진대열이 종로를 돌아 시청까지 오는 동안 200명이었던 행진대열은 어느새 약 1만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탑골공원 노인들도 행진에 동참

 

 

말로만 듣던 '아고라 네티즌 당' 활동이 눈부셨다. 인터넷 다음(Daum) '아고라'에서 할동하는 네티즌들이 시위현장에 모인 것이다. 이들은 무대를 중심으로 열리는 문화제와는 관계없이 시청 앞과 광화문 부근을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는 "이명박은 물러나라" "조선일보 폐간하라" 등이었다.

 

아고라 네티즌당 당원(?)들 연령층은 다양했다. 교복 입은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는 20대,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30~40대, 머리가 하얀 백발노인까지 모두 '당원'이다. 수도 없이 많은 집회 현장을 취재했지만 이렇게 다양한 연령층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십만 인원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장에서 간 크게도 다른 목소리를 내며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시위대 대응 방식은 허를 찌르는 유머였다.

 

"너 임마 민주노총이지? 잠깐 나와 봐."

"저 민주노총 아닌데요. '아고라'인데요"

 

한 청년이 드잡이라도 할 태세로 대들며 소리치자 한 학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너무 웃겨서 넘어 질 뻔했다. 네티즌들이 주도하는 시위현장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이었다. 무겁지 않게 비비 꼬아서 흥분한 상대방을 할 말 없게 만드는 것. 이것이 국민 MT의 진짜 얼굴이었다.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 한분도 "어째서 정치적인 일에 나이 어린 애들을 동원하느냐"며 대열을 막고 격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이구동성 "우린 스스로 나왔어요"라고 말하며 행진을 계속했다.

 

메가폰을 들고 나와 "당신들이 잘못하는 것이다. 집회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민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무시합시다. 저런 사람도 한 명쯤 있을 수 있지"라며 대응하지 않았다.

 

"저 민주노총 아니라 '아고라'인데요"

 

 

광우병 쇠고기 재협상 요구 시위는 시간이 가면서 '정권퇴진' 요구로 바뀌고 있다. 시위가 길어지면 흔히 나오는 구호가 '정권퇴진'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도 시위현장에서는 가끔 '정권퇴진' 구호가 나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위현장 핵심 구호가 '정권퇴진'이었던 적은 없다. 시민들은 '정권퇴진'도 '청와대 방 빼!'라는 말로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정치적 구호로 무장한 20만에 가까운 시위대가 지도부 통제 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그동안 믿을 수 없었다. 7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알 수 있었다. 성숙한 민주시민의식과 심각한 일도 익살스럽게 표현 할 수 있는 톡톡 튀는 유머가 자리 잡고 있었다.

 

20만 대중 앞에서 단 몇 명이 거칠게 반대 의견을 냈지만 심하게 나무라거나 화를 내는 시민은 없었다. '의견이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이것이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는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문화제가 거의 끝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주변을 정리했다. 촛불문화제 사회자도 '주변을 정리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시민들 의식 속에는 이미 앉아있던 자리는스스로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혀 있는 것이다.

 

촛불문화제를 두고 지금도 청와대 안팎에서는 배후세력, 주동자 등을 운운하고 있다. 또,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군 동원까지 주문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보수기독교계 인사인 김홍도 금란교회 목사 등이 "빨갱이들을 잡아들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기에 추부길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까지 직접 나서 '사단의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내뱉었다.

 

당신들이 틀렸다. 빨갱이도 없고 주동자도 없고 배후세력은 더더욱 없다. 주동자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무장한 '민주시민'이고, 배후세력은 익살과 재기가 넘치는 '네티즌'들이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오직 당신들뿐이다. 6월 10일, 광화문으로 나올 것은 제안한다. 직접참여해서 확인한 다음 다시 이야기하라.

 

덧붙이는 글 | 안양뉴스 유포터 뉴스


태그:#촛불문화제, #광우병 쇠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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