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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네트(M.net) '서인영의 카이스트'가 6월 5일(목)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특히 마지막 회에선 서인영의 카이스트를 통해 우리 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장면들이 많았다. 주류와 비주류의 만남, 오만과 편견이 깨지는 순간을 우리 사회가 곱씹어보길 바라면서 몇 자 적어본다.

 

몇 개의 이미지로 형성된 편견

 

'서인영의 카이스트' 초기. 신상(품) 구두에 혹해서 덜컥 카이스트를 다닌다고 했던 서인영의 모습. 항상 하이힐을 신고, 실용성이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깃털 펜을 들고 다니는 그녀를 보고 대다수 사람들은 혀를 찼다.

 

'쟤는 왜 카이스트엔 가서 설치고 난리야. 인기 좀 끌어볼라고 그러겠지.'

 

그러면서 우리는 큰 명제를 간과했다. 그녀는 최고의 석학들이 모였다는 두뇌집단에서 명백한 약자이자 비주류였던 것이다.

 

서인영은 안 그래도 그 두뇌들이 보내는 질시와 무시하는 눈빛을 견뎌내야 했고, 대학 공부라곤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백지상태였다. 결국 몇 개의 이미지로 형성된 편견으로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은 끝난 것이었다. 그건 다시 말하면 당신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국민들에게 몇 개의 이미지로 편견을 잘 생성해내는 것은 주류 언론의 몫이었다. 그들은 노동자가 시위를 하면 경제적인 손실과 사측의 애로사항에 주목했고, 고등학생이 교육에 대해 운운하면 철부지 목소리로 치부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야기한다. '열심히 하면 된다'고.

 

문제는 그들에게 의해 만들어진 편견이다. 노동자는 이미 이기적인 이익집단이고, 고등학생은 이미 풋내나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결국 사회의 아젠다를 상정하는 주류 언론은 몇 개의 이미지로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판단을 국민 대신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단의 잣대는 당신의 판단 근거가 되고 있다.

 

서인영이 카이스트를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결론부터 말하면 서인영은 카이스트에서 나름 재미있게 정착했다.

 

"(서인영에 대해) 별로 알지도 못했고, 호감도 아니었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 나한테 (영어발음에 대해) 영어 못 한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그녀의 캐릭터, 그런 모습이 대한민국 최고 가수 자리에 있게 하지 않나 싶다."

 

서인영을 한 학기동안 가르친 담당 교수의 마지막 발언이었다. 그녀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녀를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장치'가 필요했다. 동아리 활동, 교수들의 배려, 친구들의 우정까지. 다시 말하면 그 사회의 비주류를 위한 일종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려는 차후 학교 생활이나 공부 등에서 서인영의 원래 특징과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 주변엔 약자가 많다. 억울하게 직장에서 해직당하고 몇 년 째 농성중인 노동자,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밤 늦게 잠들어 꼭두새벽에 멍한 상태로 학교가는 고등학생, 그리고 머리좋은(?) 높은 분들 때문에 식량주권도 포기해야 하는 국민들까지.

 

하지만 우리 사회엔 이들을 위한 장치가 너무도 부족하다. 우리가 이들 중 한 명으로 항상 소외받고 힘들어 하지만,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만드는 걸 포기하는 건 아닐까?

거기에는 약자를 배려하기보단, 푸념하기보단,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배려가 있다면 수도 없이 많은 흙속의 진주들이 탄생할테지만, 그저 돌멩이들이 진주가 되기만을 바란다면, 몇 안 되는 진주만이 우리 주변을 구성할지도 모른다. 여러분 대부분도 돌멩이로 전락할 수 있다.

 

서인영이 마지막 수업에서 내놓은 동영상에는 자신과 카이스트의 시각차로 힘들었던 부분이 녹아 있었다. '또다른 세상의 잣대는 대부분 오만과 편견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의 진면목을 본다면) 단지 편견이었고, 그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서인영을 가르쳤던 교수들과 옆에서 지켜본 카이스트 학생들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그녀가 온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인기 연예인으로서, 그녀의 경험과 능력을 녹여낸 독특한 개성으로써, 수업과 학교 생활을 해나가는 모습은 카이스트에 커다란 '공감'의 테두리를 이끌어냈다.

 

결국 디자인 수업에선 그녀의 독특한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고, 화학 실험은 조교도 놀랄 정도의 실험값을 얻어냈다. 엘리트 집단에 대학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한 한 여성이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비주류의 '가능성'은 항상 묻힌다

 

"아이를 임신하고 학교에 휴학계를 내려고 했는데, 사실상 자퇴를 강요받고 자퇴서를 쓸 수 밖에 없었어요. 학교를 너무 다니고 싶어서 학생증을 가지고 다녀요."

- 대한민국 한 고등학생이었던 미혼모의 말 -

 

6일 MBC 9시 뉴스는 10대 미혼모 문제를 다뤘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미혼모의 71%는 학교에서 자퇴한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학력과 아이를 이유로 취직할 수 없고,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도 없어진다고 한다. 유럽국가는 학교 안에 아이들 탁아시설을 두고 있고, 아시아 국가들 역시 미혼모를 위한 위탁시설을 운영한다고 한다.

 

미혼모는 하나의 좋은 예다. 이렇듯 보통 사람들과 조금만 다르면, 조금만 약자라면 우리사회는 배려하기보단 색안경을 끼기 쉽다. 당신 역시 은연 중에 미혼모의 이런 안타까운 상황과 현실보단 그들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진 않은가?

 

그들 중엔 뛰어난 대통령도, 변호사도, 요리사도 나올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줄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신나게 썼는데 열심히 하면 된다고 이야기하면 재미는 없지만.

 

사람들은 한심하게 바라봤다. 서인영과 카이스트의 만남을. 지금까지 한심하게, 그저 카이스트에 가서 서인영이 '쇼'를 했다고 바라본다면 남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카이스트에서 마련한 장치가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상상해보라.

 

카이스트라는 주류 사회에서 분명 서인영은 비주류다. 하지만 카이스트를 벗어나면 그녀는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라고 불리는 이다. 사회에 드리운 잣대에 따라 사람들은 주류가 될 수도 있고, 비주류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든 비주류를 배려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런 장치가 너무도 부족하다. 서인영의 카이스트는 그런 장치에 대한 풋내나는 실험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CASTO, #서인영, #카이스트, #미혼모, #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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