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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이 '시대착오'의 낡은 이미지로 덧칠해 대량 유포한 말이다. 부정적 인상을 주기 십상이지만, 바로 그래서다. 이 글에서 나는 운동권이란 말을 일부러 쓴다.

 

'운동권'과 촛불을 든 시민의 소통을 소망해서다. 촛불은 신선하고 운동권은 고리타분하다는 담론이 곰비임비 퍼져 있다. 운동권과 촛불세대를 가르기도 한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기존의 진보세력을 싸잡아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는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그런 '386'도 있다. 하지만 묻고 싶다. '참여정부'와 국회에서 활동한 386들이 과연 진보세력인가. 아니다. 기존의 모든 진보세력이 신자유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듯이 이야기 하기는 사실과도 다른 매도다.

 

'광우병 쇠고기'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교육운동을 줄기차게 벌여온 사람들이 있다. 나는 노동현장, 농민현장, 빈민현장, 교육현장에서 변함없이 꿋꿋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름다운 386들'을 알고 있다. 정치권에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있다.

 

왜 그들 모두를 촛불을 든 시민과 굳이 단절시키려 하는가. 그런 담론을 펴나가는 지식인의 글과 말을 마주칠 때마다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아름다운 386과 촛불세대를 누가 단절시키고 있는가

 

2002년 효순-미선의 원혼을 위로하며 밝힌 촛불 때도 그랬다. 줄곧 운동해 온 사람들에 대한 불신은 촛불의 분열로 이어졌다. 친미사대 언론의 틀(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그 결과는 촛불의 몰락이었다.

 

오해 없기 바란다. 진보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지금 촛불 집회를 '지도'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진보세력은 실제로 그것을 지도할 역량을 갖출 만큼 준비하지도 유연하지도 못한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려고 온 생애를 바쳐온 사람들과 촛불을 들고 나선 사람들 사이에 단절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없는 단절을 굳이 단절시키려는 담론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그렇다. 지금은 '운동권'으로 매도 당해온 진정한 진보세력과 촛불세대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다. 그러려면 진보세력과 촛불을 든 시민 모두 성찰이 필요하다.

 

먼저 진보세력이다. 그동안 진보세력은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설, 실현가능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는 데 스스로 소홀했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로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의 가슴에 다가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자기 안의 경직된 신념을 다지거나 '뺄셈'을 하며 분열하는 데 많은 시간과 힘을 소모한 탓이 아닐까.

 

촛불을 든 시민들도, 10대 청소년들도 성찰해 볼 물음이 있다. 혹 진보세력에게 선입견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 선입견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꼭 짚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상당수에게 그 선입견의 기원은 저 부라퀴 언론이다. 촛불을 든 시민은 순수하고, 운동권은 불순하다는 도식은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논객들 사이에서도 엿보인다. 과연 그런 도식이 옳은 것인가. 성찰이 절실한 까닭이다.

 

먼저 진보세력이 시민에게 '낮은 목소리'로 다가서라

 

그렇다. 촛불을 들고 만나야 한다. '운동권'과 촛불을 든 시민 사이에 단절을 강조하는 수구세력의 불순한 의도에 대해선 굳이 거론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진보논객들이 그런 담론을 펴는 일은 옳지 못하다.

 

그래서다. 촛불 아래로 진보세력이 먼저 시민에게 다가서길 제안한다. 다가설 때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어깨에 힘을 뺄 것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해 갈 것을. 촛불 아래서 민주시민도 '운동권'에 다가서길 제안한다. 다가설 때 정중히 당부하고 싶다. 선입견을 벗어나길, 이야기를 경청하고 판단하길.

 

'운동권'과 시민이 마음을 열고 소통할 때, 바로 그 때가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설 주권혁명의 출발점 아닐까.


태그:#촛불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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