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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 킹과 프렌들리했던 어린 시절

 

엄마는 "TV는 바보상자"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드라마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마지막 편이 끝날 때까지 계속 브라운관 앞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아무리 봐도 끄고 돌아서면 머리 속에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 세상에 이런 시간 낭비가 또 없다고. 그러니 TV 끄고 방으로 들어 가서 공부나 하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렸을 적에는 <마지막 승부>나 <모래시계>, <종합병원>처럼 당대를 호령하던 드라마들을 제대로 보지 못해 학교에서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의 틈에 제대로 끼지 못하던 것이 차마 말 못할 응어리였다. 

 

하지만 영영 TV 앞에 앉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밥 먹는 일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영어 조기교육이었으니까.

 

영화든 뭐든 한글 자막이 깔린 영어로 된 영상에 한해서는 극단적으로 관대한 것이 또 우리 엄마였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로보캅2>를 빌려와도 영어니까 오케이, 미국 프로레슬링 하이라이트나 <덤 앤 더머>를 빌려와도 영어니까 무조건 오케이였다.

 

초등학생이던 동생이 그런 엄마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것은 한글 자막이 깔린 <라이온 킹> 비디오 테이프였다. 케이블TV가 이제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지만, 엄마가 집안에 케이블 TV 같은 걸 들여놓을 리가 없다.

 

동생은 만화 영화를 보고 싶을 때마다 테이프가 마르고 닳도록 '심바'의 인생 역경 스토리인 <라이온 킹>을 틀어댔다. 덕분에 옆에 있던 나도, 사자 울음소리가 앵앵거리는 환청이 학교에서도 들려올 정도로 <라이온 킹>을 달달 외우게 되었다. 내 영어 공부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바의 표정만 봐도 저 녀석이 지금 어떤 대사를 (한글자막으로) 내뱉을지, 앞으로 무슨 장면이 나올지 훤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 라이온 킹을 뮤지컬로?

 

런던의 종합 관광 안내 웹진 <런던타운>이 추천하는 뮤지컬 1위가 그 <라이온 킹>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말해 의아했다. 원래 연극이란 영화보다 훨씬 더 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객의 바로 앞에 노출된 좁다란 무대 위는 배경의 구성이나 공간의 이동, 장면 전환 같은 것들에 있어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라이온 킹>은 그냥 평범한 만화영화도 아니고, 최신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십분 활용한, 당시로서는 아주 방대한 규모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이걸 무대 위에서 표현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왕자 심바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든 동물들이 모여들던 그 유명한 오프닝은 물론이고, 심바와 암사자 날라가 앵무새 자주를 골탕먹이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장면은? 엄청난 물소떼들 사이에서 무파사가 심바를 구해내는 장면은? 그리고 다 자란 심바가 무파사의 영혼을 만나는 장면은?

 

그 전에 아프리카의 동물들이라는게 기린, 코끼리, 타조, 새들처럼 크기부터가 제각각인데, 연극이라는 게 기껏 사람이 옷 입고 탈 쓰고 나오는 게 아닌지. 코끼리의 크고 육중함은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앵무새의 작고 가벼움은 또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을 서른 번쯤 본 입장에서 걱정이 다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위라니? 배우들이 노래를 무진 잘 부르기 때문일까. 전체 관람가다 보니 영어 대사를 알아 듣기가 쉬워서 비영어권 여행자들이 많을 수는 있겠지. 어디 한번, 얼마나 잘 만들었나 두고 보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레스터스퀘어의 티켓 할인점에서 영어 한 마디 더 해보겠다며 맨 뒷좌석이 어떻게 28파운드씩이나 되냐고 아랍인 매표원에게 괜한 투정을 부려 보고는 서둘러 전용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몇 년째 1등 먹는 이유

 

그리고 2시간 30분 뒤…. 나는 입을 헤벌린 채 손이 터져라 박수를 치고 있었다. 관객석의 그 누구도 손뼉을 그치려 하지 않는다. 여태 이렇게 오랫동안 박수를 쳐 본 기억이 없는데, 손이 슬슬 뜨거워지면서 부어 오르는 게 느껴지는데도 그저 계속해서 박수를 쳐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시차 덕에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지만 가슴 속에서 뭔가 요동치는 것이 도저히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럴 만한 공연이었으니까, 이만한 감동은 자주 느낄 수 있는게 아니니까.

 

좁고 오래된 무대 위에서 아프리카의 드넓은 초원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당초에 월트디즈니사가 수백억 원을 쏟아 부어 만든 방대한 스케일의 영상이, 크지도 않고 비싸 보이지도 않지만 어마어마한 고민과 관찰 끝에 만들어낸 소도구로 완벽하게 재연되고 있었다. 기린과 코끼리, 새들 같은 각양각색의 동물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의구심도 기우였다.

 

티몬과 품바를 어쩌면 저렇게 꾸며낼 생각을 했을까. 한 번에 십수 명의 배우가 나와도 어지러운 판에 수백, 수천 마리의 물소 떼가 협곡 아래로 우르르 달려 나오는 장면을 그대로 연출해 낸 능력에는 대단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배우들의 연기나 노래, 무대 위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압도적으로 훌륭하다.

 

사람이 커다란 감동을 받거나 아니면 극도로 피곤하거나, 혹은 죽기 직전의 상황에 맞닥뜨리거나 하게 되면 몸에서 마약 성분이 배출된단다. 마약이 왜 무서운고 하니 중독이 되기 쉬운 데다가 한 번 맛을 들이면 정상적인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칠 때까지 달리고 나서의 묘한 나른함과 쾌감을 잊지 못해 운동 중독에 걸린 선배를 한 명 알고 있다. 죽기 직전에 느낄 수 있다는 짜릿한 어떤 기분을 위해서 스스로 목을 조르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도 인터넷에서 가끔 보인다.

 

<라이온 킹>의 감동을 잊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대학로의 연극 무대를 꽤나 맴돈 내 경우도 정도는 좀 덜하지만, 그래도 일종의 중독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숭동 우리 연극판은...

 

함께 연극을 볼 사람이 있다면 좋은 일이고, 여의치 않으면 까짓 거 혼자 봐도 상관 없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우리의 연극판을 둘러 보면서 느낀 점은 딱 세 가지다. 첫째로 연극이란 정말 즐기기 괜찮은 문화 생활이며, 둘째로 우리 나라에도 <라이온 킹> 못지 않은 훌륭한 공연들이 꽤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대학로의 이름 없는 소극장에서, 관객보다 배우의 머릿수가 더 많은 안쓰러운 상황에서도, 배우들은 무대가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기껏 연습해 온 공연을 보러 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김이 빠질 만도 한데 그 열정만으로도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무명 극단의 그런 인기 없는 공연은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는 <라이온 킹>이 공연될 때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적자를 기록한 나라가 한국이랜다. 1인당 술 소비량이 세계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우리 나라 국민들 사이로 연극과 뮤지컬이라는 참 괜찮은 놀이 문화가 있다는 게 널리 알려졌으면 싶다.

 

술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술 값 좀 덜 써서 아낀 돈을 공연예술에 투자를 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의 문화생활이 좀 더 멋있고 우아하게 느껴지는 맛을 누릴 수 있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으로도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겨서 연극을 즐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면, 언젠가는 <라이온 킹>보다도 훨씬 멋진 공연이 우리 나라 사람 손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 거다.

 

'난 평소에도 한국에서 뮤지컬 마니아였으니까 당연히 런던에서는 뮤지컬만 죽어라 보자.

나 정도는 되어야 그래도 뮤지컬을 즐길 자격이 있는 거야'하는 정도는 누구도 바라지도 않고 보통 사람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도 전혀 없다.

 

'런던에 왔으니 뮤지컬은 한 편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본 <라이온 킹>이나 <맘마미아>가 '런던 뮤지컬은 참 좋았는데 우리는 어떨까'하면서 관심을 갖게 될 계기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잘 찾아보면, 우리 나라에도 <난타>나 <지하철1호선>, <라이어> 같은 멋진 공연이 아주 많으니까. 우리에게 더 좋은 것들이 있다면 뭐 굳이 유럽까지 갈 거 없지 않을까.

 

 

그리고... 위 윌 락 유(We will rock you)는?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는 다르겠지만, 록 그룹 퀸의 노래들을 모아 만든 뮤지컬 <위 윌 락 유(We will rock you)>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영어 대사도 쉬운 데다가 시종일관 신나는 공연이었고, 배우들의 노래 실력도 다들 최고였다. 하지만 그들은 에이즈로 작고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아니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부르지 않는 노래를 <보헤미안 랩소디>로 인정 할 수는 없다. 더 이상 퀸의 노래를 부를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가짜시인, #유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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