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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1호선은 왜 서울역에서 청량리로 뻗은 노선이었을까. 110여년 전 같은 노선에 전차가 놓이고, 쓰러져가는 조선의 왕 고종이 그 노선을 통치에 이용했다는데.

 

조선시대 서울에선 군인이 생계를 위해 장사에 나섰고, 그 수가 불어나면서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시대 서울에서 흔하게 보았던 물장수는 비정규직의 원조라 할 만하다.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전우용(46) 교수의 눈에 비친 서울은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을 역임한 그는 <서울상업사>(공저), <청계천 : 시간, 장소, 사람>(공저), <서울 20세기 : 100년의 사진기록>(공저)와 같은 책을 펴냈다. 이번에 낸 책은 <서울은 깊다>이다. '깊다'라는 단어에서 서울에 대한 그의 애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책 <서울은 깊다>
책 <서울은 깊다> ⓒ 돌베개

글쓴이는 메스를 이용, 조선 500여년 수도 서울을 세밀하게 벗겨낸다. 보통 사람 눈에는 비슷하게 보일 뿐인 경복궁과 창덕궁의 차이는 조선의 미래를 놓고 큰 싸움을 벌인 이방원과 정도전의 차이였다.

 

왕권과 동등한 신권을 강조한 정도전의 생각은 경복궁에 그대로 반영됐다. 왕이 사는 궁역보다는 신하가 머무는 궐역이 더 비중이 크다. 궁 내에서 가장 큰 건물 또한 왕과 신하의 합동 연회장인 수정전(전면 10칸 측면 4칸)이다. 왕의 개인 정원인 후원 또한 턱없이 좁다.

 

그에 반해 창덕궁은 왕권을 강조한 이방원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궁이다. 신하들을 위한 공간은 찾아보기 힘든 대신, 왕이 노니는 후원은 상당히 크다. 이방원에게 신하는 어디까지나 왕의 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알면 보인다고 했던가. 단지 조선시대 궁궐의 화려함과 거대함에 놀라기보다 이런 차이를 알고 보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은 깊다>는 서울을 둘러보는 재미를 제대로 준다. 지금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집권자가 어떻게 구상을 했는지가 잘 담겨져 있다.

 

'무능한 군주'로 낙인찍힌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대한 글쓴이의 애정은 각별하다. 외세에 휘둘린 군주라고 손가락질하긴 쉽다. 하지만 그 때가 지금이고, 내가 그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쉽게 깎아내리긴 힘들 것이다.

 

고종은 조선시대 유일하게 왕비 자리를 10년 간이나 비웠다.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게 살해당한 뒤다. 이 땅에서 왕조 역사가 시작된 뒤 남자가 왕위에 있으면서 왕비가 지정되지 않은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고종이 새 왕비를 뽑지 않은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파격을 벌인 이유에 대해 전우용은 사람들이 계속 기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해석했다. 예나 지금이나 집권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백성들의 큰 관심사다. 빨래터에 모인 아낙들이나 주막에 모인 남정네들이나 왕비가 없는 것을 두고 두고 얘기했을 것이다. 더불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이야기가 당연히 나왔을 것이고. 이를 통해 백성들이 일제를 증오케 하고 맞서는 의지를 갖도록 만들었다는 게 글쓴이의 해석이다.

 

이 땅 최초 전차노선을 종로를 지나 멀리 청량리까지 이어지도록 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단다. 종로는 조선시대 최고 번화가, 청량리 근처 홍릉엔 명성황후묘가 있었다. 전차를 타고 살해당한 왕비를 참배하러 간다면 그 만한 이벤트가 없었을 터. 고종이 노렸던 게 그랬던 것이 아닐까.

 

정동 일대를 비롯 서울 곳곳에 고종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고종의 의지가 어떻게 지금 서울에 반영됐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글쓴이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서울을 달리는 지하철, 건물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다. 이렇게 현대 서울과 과거 서울이 절묘하게 만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H.카아의 말을 굳이 내세울 필요도 없다.

 

현대 사회 문제점, 살펴보니 조선시대에도 있었네

 

 불타기 전 숭례문 사진. 글쓴이는 2008년 숭례문 화재는 역사 문화 상업주의에 대한 뼈아픈 경고라고 책에서 표현했다.
불타기 전 숭례문 사진. 글쓴이는 2008년 숭례문 화재는 역사 문화 상업주의에 대한 뼈아픈 경고라고 책에서 표현했다. ⓒ 김대홍

천민 자본주의나 지역감정도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똑' 떨어진 게 아니다. <서울은 깊다>를 보면 조선시대 이미 그 모습들이 보인다. 종친이나 대관 주변에 모여 상관의 눈치를 살피며 이익을 쫓은 겸인들은 조선 후기 도시가 발전하면서 무뢰배 자본가가 된다. 상전을 등에 업고 호의호식한 그들은 상전이 몰락하면 재빨리 다른 상전을 찾아 나섰다.

 

새 상전을 위해 이전 상전을 물어뜯는 경우도 있었다. 을사늑약 후 내부대신을 거쳐 일황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매국노 송병준 또한 민태호 민영환 집안 겸인 출신.

 

지역감정의 경우 조선시대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더했다. 각 당파들이 동서남북 서울에 각각 모여 살며, 북인, 남인, 서인, 동인이라고 불렀다. 당파가 다르면 다른 당파 땅에 들어가는 것도 금기였다. 성 밖 사람에 대한 성 안 사람들의 차별도 심했다.

 

양반들이 자신이 가진 지위를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한 몸부림도 치열했다. 과거에 합격만 하면 부가 보장되던 시절이었다. 시험문제 빼돌리기, 답안지에 표시하기, 대리시험 등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그 결과 시골 선비가 과거에 합격하기는 점점 힘들어졌고, '명가의 자제는 날 때부터 다르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글쓴이는 이런 사례를 통해 그 때가 단순히 미개했다거나, 지금이 좋다는 식으로 가볍게 결론을 끌어내지 않는다. 과거는 현실을 비추는 훌륭한 거울이다. 더불어 살기보다 나눠 사는 현상은 조선 시대 후기에 나타났다. 조선이 초창기 건강성을 잃고 쇠퇴기에 들어선 이유로 글쓴이는 '끼리끼리'를 꼽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1980년대 말 이후에 만들어진 '신도시'들은 '섞여 살기'보다는 '따로 살기'를 원하는 주택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했다. 자신의 자녀가 '영구'(영구임대주택 거주 학생을 일컫는 슬픈 속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을 탓할 수야 없지만,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 P56

 

이 책이 흥미로울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유행처럼 번지는 말들을 과거 역사를 통해 은근히 풍자하기 때문이다. 'CEO형 지도자'라는 말도 그 중 하나다.

 

책에 따르면 조선시대 후기 지방관은 관리라기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웠다. 다방면에 걸쳐 사업을 벌였고, 큰 수입을 얻었기 때문이다. 평안감사 시절 끌어모은 돈만 갖고도 일제 강점기까지 조선인 최고 갑부소리를 들은 민영휘는 그 대표격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관직은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벌어졌고, 수입이 느는 만큼 관직값도 높아졌다. 요즘으로 치면 프리미엄이 붙은 것이다.

 

오래 전 역사지만 <서울은 깊다>에 비친 조선과 일제시기 서울은 놀랄 만큼 지금과 닮아 있다. 그래서 흥미롭게 읽다가다 어느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게 된다.

 

이 땅 최초 여성 노동자는 궁내부 정미소 직공

 

빈대떡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도성 안 거지들을 구하기 위해 만든 긴급 음식이 빈자(貧者)떡. 이 빈자떡이 빈대떡이 됐다.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은 연산군의 방탕에서 비롯했다. 연산군의 유흥을 위해 대궐로 불러들인 젊은 여성들을 흥청(興淸)이라 불렀던 것. 가게란 말은 임시로 지은 가건물인 가가에서 나왔다. 서울 종로 주변에 많았던 가가는 주로 상업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가가가 변한 '가게'가 상업점포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최초'를 찾아보는 일도 흥미롭다. 이 땅 최초의 보도육교는 경운궁(덕수궁)과 경희궁을 연결한 홍교이고, 최초 정수장은 1908년 준공한 뚝섬정수장이다. 이 땅 최초 여성노동자는 대한제국 시기 만들어진 궁내부 정미소 직공이었다.

 

전문 학자가 쓴 책이기 때문에 다소 딱딱할 수 있는 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글쓰기, 체험이 어우러지면서 흥미롭게 이어진다. 글쓴이는 수돗물이 안나와 사이다로 밥을 해먹은 경험을 털어놓고, 복덕방에 얽힌 아픈 추억을 꺼낸다.

 

"나는 복덕방이라는 명칭에 대해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내 어머니는 아들의 어두운 안색을 교정해보시겠다고 금 메끼칠(도금)한 안경을 맞추어주셨다. 나는 아주 어려서도 자주 애늙은이로 불리곤 했는데, 이 안경은 상황을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켰다. 당장 센스 있는(그러나 내게는 얄밉기 짝이 없는) 친구 녀석 하나가 내게 '복덕방'이라는 치명적인 별명을 붙여주었고(당시 안경잡이에게 붙는 별명은 보통 '네눈깔'이나 '사이클' 정도여서 복덕방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 별명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 선생님들도 다 아는 내 공식 별명으로 끈질기게 붙어 다녔다. 복덕방은 '영감'과 동의어였다." - P326~327

 

역사드라마와 역사소설이 넘치는 시대다. 역사드라마 속 주인공이 스타가 되기도 하고, 원작 역사소설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한다. 사극 세트장이 인기관광명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박제가 돼버린 역사는 정성껏 보존하면서 근대와 현대 역사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파괴작업이 이뤄진다.

 

일제시대 건물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40~50년 된 집은 도시 흉물이라는 이유로 지워진다. 그렇게 역사는 현대와 교감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현대와 그 상관없는 그 무엇이 돼버리고 말았다. 글쓴이가 이 책을 지은 의도는 첫머리에 잘 나온다. 결국 책장을 덮는 순간 남는 질문은 어떻게 이 도시를 가꿀까이다.

 

"이 땅에서 한 세기 넘게 지속된 오리엔탈리즘 학습은 토속적인 역사, 죽은 역사는 즐거이 상품화하면서도 아직껏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는 아프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감추고 숨기는 태도를 깊이 심어주었다.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대장간은 후딱 복원하면서, 난지도 역사를 살아서 증언해온 구조물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허물어버리는 이율배반의 시대가 21세기형 '역사의 시대'요 '문화의 시대'였다.…이런저런 자리에서 그런 상황들을 반복해 겪으면서, 누군가를 향해 역사에는 팔 수 없는 가치, 팔아서는 안 되는 가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돌베개(2008)


#서울은없다#전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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