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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화석 보니 안구에 쓰나미가...

 

깜찍한 튜브에서 내린 나는 어두컴컴한 런던의 지하철역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빛줄기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이 확 밝아졌다.

 

푸른 하늘 아래의 파란 잔디밭 위에서는 말쑥한 복장의 유치원생들이 줄지어 앉아 있고, 그 맞은 편으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려온 그 건물이 당당하게 서 있다.

 

런던에서의, 아니 유럽에서의 첫 번째 목적지는 영국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런던에는 빅벤과 국회의사당도 있고 타워브리지도 있고 버킹검궁도 있는데 이런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박물관부터 덮어 놓고 찾은 데에는 해묵은 이유가 있었다.

 

메인홀 중앙의 공룡 화석 뼈대를 본 순간, 가슴이 벅차 오른다. 까마득히 오래 전에 진 빚을 갚은 느낌이다. 이곳 저곳 두리번거리면서 정신 없이 사진을 찍는 와중에도, 목구멍에 묵직한 무언가가 들어찬다. 가슴이 떨리고 코 끝이 빨개지는가 싶더니, 코에서는 콧물이,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연신 코를 훌쩍이면서도 사진만은 억척스레 철컥철컥 찍어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공룡뼈를 보다가 난데 없이 우는 남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꼴볼견이다. 흥분을 가라 앉히고 기억을 정리할 여유가 필요하다. 박물관 구석의 매점에 앉아서,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17년 전의 일을 떠올려 본다.

 

 

17년 동안 기억한 일

 

17년 전, 나는 여덟 살짜리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교사이신 부모님은 내게 책을 사주시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고, 나는 그 중에서도 공룡이 나오는 과학 문고를 가장 좋아했다. 초등학교 1학년 사내아이라면, 한참 공룡 좋아할 나이이긴 하지만 나는 좀 유별난 편이었던 것 같다.

 

알로사우르스, 스테고사우르스, 브론토사우르스 하는 공룡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었고, 친구들이 "나는 후레쉬맨이다! 메칸더 브이다! 까불지 마라!" 할 때 혼자 "그럼 나는 박치기공룡 파키케팔로사우르스다!"하며 머리 박치기를 "쿵쿵"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공룡의 뼈대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 사진이 실린 책을 들고, 아버지에게 가서 아빠 여기가 어디냐고, 나 여기 가고 싶으니 데려다 달라고 당돌하게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 부드럽게 웃으시며, 여기는 영국의 런던이라는 도시에 있는 박물관이라고, 지금은 안 되겠지만 나중에 우리 중현이가 다 커서 어른이 되면, 그 때는 꼭 데려다주마 하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도장까지 꾹 찍었다.

 

그때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은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였다. 수돗물이 안 나오는 날도 많았고 정전도 곧잘 되는 그런 곳이었다. "오오 여기는 서울랜드~" 하면서 어린 마음을 자극하던 놀이공원 광고를 보고 있던 내게, 엄마는 다가오는 어린이날에 무얼 하면서 놀고 싶냐고 물었지만, '서울은 여기서 너무 멀어서 못가' 하는 생각에 말도 꺼내지 못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물며 외국이란, 지구본을 반바퀴나 빙그르르 돌려야 나타나던 영국이란, 애초에 절대로 디뎌 볼 수 없는 땅일 줄 알았다. 아버지가 그때의 일을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17년 전 약속을 지켜주셨고, 나는 바로 여기 영국자연사박물관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공룡박물관이 아니라 생태계 전반에 대한 전시관인 '자연사박물관'이다. 흰긴수염고래와 아나콘다, 심해아귀, 도도새처럼 웬만 해서는 보기 힘들거나 아니면 이미 멸종되어 버린 동물들도 많았지만, 눈물을 쓱 닦아내고 나니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에 할머니 따라서 대구의 어린이대공원에서 봤던 동물전은 이보다는 좀 소박했지만 대단히 인상 깊었었는데. 더 어릴 때 왔었어야 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뜬다. 17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스물다섯 살 먹은 남자가 유치원생들이랑 같이 공룡 보면서 입을 헤 벌리는 일이 그리 상쾌하지는 못하다.

 

남들 다 찍는 타워브리지 사진

 

"히야~ 정말이네. 이거야!!"

 

사진으로만 숱하게 봐왔던 타워브리지가 책에 나온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비로소 내가 유럽에서도, 런던이라는 도시에 와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내 손은 기계적으로,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전원스위치 on.

렌즈캡 제거.

감도, 조리개확인.

초점조절.

구도조절.

샷.

 

템즈강 남단의 런던시청 앞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엄청나게 많은 화가와 사진가들이 그 나름의 시행착오들을 겪은 끝에 찾아낸, 타워브리지를 보기 위한 이른바 최적의 촬영 포인트였다.

 

나도 수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의 액정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가이드북과 꼭 같은 영상이 뜬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모두가 타워브리지를 바라보며 똑같은 사진을 찍었고, 나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찍은 것이다. 그런데, 문득 기분이 야릇해지면서 이상한 생각들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다.

 

젊은이의 여행은 달라야 한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여행이란 또 무엇인가. 돈도 없고 시간도 별로 없는 대학생들이 부모님의 쌈짓돈 혹은 피 같은 알바비와 여름 방학을 탈탈 털어서 이 멀기도 멀고,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음식도 안 맞고, 물가도 비싼 유럽에까지 날아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고작 가이드북에 나온 종탑과 교회와 궁전의 실제를 확인하고 배경만 다른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을까.

 

여기까지 온 우리 젊은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배워서 앞으로의 삶에 밑거름으로 만들어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

 

"런던의 거리에 있는 건물들은 죄다 수백 년 전부터 지어진 석조건물들이더라 참 예쁘더라. 그나저나 대영박물관이라는데는 어떻게 된 게 자기네 나라 유물보다 남의 나라에서 훔쳐온 것들이 훨 더 많더라. 이런 못 되먹은 침략자놈들 같으니."

 

이런 건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즐겨야할, 그러니까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젊은 시절의 고생을 보상 받기 위해 즐기는 관광이다. 하지만 젊은이의 여행은 달라야 한다.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할 젊은이의 여행은 그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대영박물관에는 제국주의 시절 훔쳐온 유물들도 잘 보관되어 있더라. 남의 나라의 문화유산들도 이렇듯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인데 자기네 것들은 오죽하랴. 거리를 나가보면 1806년 런던 대화제 이후로 지은 석조건물들이 죄다 그대로 보존되어 있더라. 어디를 가든 '여기는 영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나라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우리만의 것들은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현대화와 서구화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한민족의 정체성을 잃는 것은 곧 나라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럼 대체 무엇이 한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거고, 그 중에서도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 정도 생각 정도는 되어야 그 비싼 비행기 요금을 지불한 만큼의 가치를 돌려 받을 수 있을텐데 하는 되바라진 생각을 해본다.

 

기왕이면 사진도 좀 다르게?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자. 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의 테마를 잡는 일이고, 내 여행의 테마는 사진이다(이 당시만 해도 사진이었다). 네이버 이미지에 간단히 타이핑만 한다면, 내가 찍은 타워브리지와 똑같은 사진을 수십, 수백 장은 찾아낼 수 있다. 이런 것을 촬영하는 것은 의미가 거의 없다.

 

'엽서에 나온 대로 예쁜 사진 잘 나오는 명당 찾아 떠나기'는 기회비용이 너무 비싸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느낌을 받아서 같은 사진만 찍는다면, 퇴보는 없겠지만 바뀌는 것도 없고 발전도 없다.

 

남다른 생각을 하자. 굳이 남다른 장소를 찾아 다닐 필요까지도 없다. 남다른 시각을 갖고, 그 증거로 남다른 사진을 찍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여행의 목표가 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가짜시인, #유럽여행, #런던 자연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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