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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문이 왜 안 열려?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낯설다. 서울의 마을버스보다도 작아 보이는 지하철은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문도 열리지 않는다.

 

왜 내가 서 있는 쪽만 문이 열리지 않을까 하면서 멀뚱히 플랫폼에 서 있다가 하마터면 한참을 기다린 지하철을 그대로 보낼 뻔 했다.

 

주변엔 온통 얼굴이 희고 덩치가 좋은 사람들이 꾸륵꾸륵거리면서 이상한 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국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영어를 쓰는 것일테고, 십 수년간 딴에는 성실히 영어 공부를 해 온 내가 이 사람들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만, 나는 저 말이 영어인지 독일어인지 러시아어인지를 도저히 못 알아 먹겠다.

 

영어 공부 헛했다. Orange는 오렌지인가 아륀지인가. 몇 달만에 귓구멍을 뚫어주고 혓바닥에 빠다를 발라 준다는데 혹해서 갖다 바친 영어회화 학원비가 장님 기름값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어서 빨리 이 낯선 땅에서 적응하려거든, 저 딱딱한 영국식 억양에 익숙해져야 한다.

 

요절복통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점잖을 빼는 듯 하면서 상대를 조롱하는 게 영국식 유머라고 한다.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가만히 곱씹을수록 제 맛이 우러나는 영국식 유머를 외국인이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다던데, 건조한 지하철 광고판을 보면서 피식 웃을 수 있으니 마냥 앞이 깜깜하지는 않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벽돌과 나무로 쌓아 올린 이층집들이 줄줄이 늘어선 지하철 창밖의 풍경도 참 이지적이다. 유럽풍이다. 아, 맞다. 여기 유럽이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시차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데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고는 온통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들뿐이니 이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꿈이면 안 되는데… 꿈이면 안 되는데…'라는 꿈 같기만 한 걱정으로 머리 속이 가득한 와중에 런던 교통의 핵 빅토리아 스테이션에 다다른다.

 

현지 유학생의 무허가 민박 

 

새로운 환경에서는 누구나 헤매기 마련이다. 해외여행이 점차 보편화 되었고 더는 비행기 타는 일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행 초심자들에게는 여행지에서의 생존, 이른바 현지적응이 가장 중대한 관심사다.

 

비행기를 놓쳤다느니, 목적지 공항에서 입국을 거절당했다느니 하는 드물게 들려오는 이야기에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다. 막상 경험해 보면 별 일이 아니지만, 시커먼 미지의 영역에 대한 부담감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초보 배낭족이 꿰어야 할 첫 단추는 목적지 공항에서부터 숙소를 찾아가는 일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실내를 가득 메운 외국인들에게 아찔함을 느끼겠지만, 어떻게든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 나와야 한다.

 

그리고 출발 전에 미리 알아 둔 교통수단에 올라 타, 환전 해 온 돈으로 차비를 내고, 예약해 둔 숙소를 잘 찾아가서 몸을 누일 침대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생존'이라는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검증하는 셈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경우는 숙소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여, 담배 왔냐!"하면서 마중 나온 런던 유학생이 한 명 있었으니까. 길을 잃으면 어떡하나, 소매치기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며 잔뜩 신경이 곤두서있다가 의지할 구석을 만나게 된 나는 지옥에서 부처님 만난 듯한 기분이지만, 내 친구 상기는 면세점에서 사 오기로 약속했던 담배가 나보다 더 반가운가 보다.

 

런던에서 사는 담배 한 갑 가격이 공항 면세점에서 사는 담배 한 보루 값이랑 비슷하다 보니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몇 년 만에, 그것도 이런 낯선 땅에서 만난 고등학교 시절 친구한테 꺼내는 첫 인사가 '담배 왔느냐'라니. 이래서야 면세점 담배 한 보루로 하루치 방세를 대신 받는다는 런던의 다른 민박집이랑 다를 게 뭐람. 이런 녀석에게 숙식을 내맡긴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싶다.

 

어쨌거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영어? 영국어? 미국어?

 

영국에서 'Apple'은 '애플'이 아니라 '아쁠'이다. 'Bank'를 '뱅크'라고 말하다가는 미국식 천박한 영어를 쓴다고 무시당한단다. 'Bank'는 '바앙크'다. 'Computer'는 '컴퓨러'가 아니라 '콤·퓨·터'라고 똑똑 끊어서 읽어줘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영화 보면서 먹는 팝콘은 '폽콘'이 된다. 화들짝 놀라는 일이 있으면 '오마이 곳!'이라고 내뱉는 사람들이 'London'은 왜 '론돈'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응용 하자면, 레스토랑에서 따뜻한 물을 부탁할 때는 발음 굴린답시고 "김미 썸 핫 워러, 프리즈"라고 했다가는 말투가 천하다고 비웃음을 사기 때문에  "기브 미 쏨 홋 와타 플리스"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 부탁하는 말이니만큼, 첫 머리에 'Would you mind'를 붙여 주면서 문장 맨 끝 부분을 의문문으로 살짝 올려주면 비로소 진짜 영국식의 아주 정중한 표현이 완성된다. '윌유' '캔유' 다 필요없다. 영국에서는 '우쥬' 하나면 된다.

 

"우쥬 마인 기빙 미 쏨 홋 와타 플리스?"(제게 물 좀 가져다 주셔도 괜찮으시겠어요?)면 완벽하다.

 

영국식과 미국식 영어의 차이는 발음 말고도 무궁무진하다. 잘 알다시피 지하철은 서브웨이가 아닌 언더그라운드가 되고, 보통은 튜브라고 많이 부른다. 영화를 보려거든 씨어터가 아닌 씨네마(Cinema)로 가야 한다. 씨어터는 말 그대로 극장이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을 보는 곳인데, 희한한 것이 'Theater'가 아닌 'Theatre'로 쓰면서, 씨어트레가 아니고 씨어터라고 발음한다는 것이다. 중앙을 의미하는 'Centre'도 센트레가 아닌 센터가 된다. 역시 씨어러, 쎄너라고 굴렸다간 최악의 발음으로 비하된다.

 

미국식으로는 없는 단어도 많다. 줄서기를 뜻하는 'Queue'야말로 가장 많이 쓰는 단어로 영국 영어의 꽃이고, 쓰레기는 트레쉬가 아닌 '레디쉬'다.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는? 미국이나 영국이나 똑같다. 브링 유어 수퍼바이저!

 

미국 영어가 지배하는 한국에서 살려면 이왕지사 영어를 배우려거든 영국보다는 미국이나 캐나다가 나을 것도 같다. 게다가 영국에는 한국인이 적으니 영어를 쓸 기회야 아무래도 좀 더 많겠지만, 물가가 비싸서 방귀 좀 뀌는 집안 도련님이 아닌 이상 발 붙이기가 힘들 법 하다.

 

날씨도 구질구질하고, 영어도 맞지 않고, 물가도 비싼 이런 곳에서 상기가 어학 연수생활을 하는 데는 그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전부터 미국에서 얻어 먹은 게 많은 우리는 미국식 영어가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런 영국식 억양을 고급스러운 영어라고 보고 있고, 실제로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전세계 대부분 영어권 국가들이 영국식 영어를 발음하고 있다.

 

심지어는, 영국식 정통 억양을 배우기 위해 일부러 영국으로 오는 미국인도 있단다. 미국식보다는 우리말 발음에 조금 더 가까운 영국식 영어가 따라 하면서 배우기에 덜 낯간지러운 장점도 있다고 한다.

 

생활비의 경우 영국은 호주나 뉴질랜드와 더불어서 학생 비자를 가진 유학생이 주 20시간 동안 합법적으로 파트타임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어권 국가 중의 하나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그만큼 인건비도 비싸기 때문에 그럭저럭 방세와 식비, 용돈 정도는 벌어들일 수 있다. 아르바이트 하느라 시간을 빼앗기면 영어 공부는 언제 하느냐 하고 의문스럽겠지만, 영국에서는 생활자체가 영어 아니던가.

 

상기의 경우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생선 초밥집에서 서빙일을 하면서, 같은 종업원들이랑도 친해지게 되고 손님들도 상대 하다 보니 영어도 자연스럽게 늘게 되더란다.

 

생선초밥이라는 게 만든 지 하루가 지나면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보니 그날 그날 팔고 남은 초밥은 고스란히 상기의 차지가 되기도 한단다. 덕분에 런던에 있는 동안은, 내 입에서 나는 생선 비린내를 내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초밥에 푹 절어 살게 되었다.

 

서양식 입맛대로 생선살과 밥 사이에 고추냉이 대신 치즈가 들어가는 얄궂은 맛이지만 먹을 것 없다고 소문난 나라인 영국에서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건 더 없이 다행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먹을 기회가 흔치 않은 초밥이 냉장고 안에 가득 들어차 있으니, 다른 배낭족들처럼 일부러 왕케이를 찾아가서 볶음밥을 주문할 필요가 없는 것도 좋다.

 

축복의 공짜 초밥

 

음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국은 음식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는 나라다. 영국은 기본적으로 날씨가 우울하여 농사짓기가 쉽지 않아 먹을 것이 많지 않았다. 수 백년 전부터 청교도들이 절식하자며 점잔 떨던 버릇이 남아 있는 데다가, 두 차례 세계대전과 IMF를 겪으면서 국민들은 더욱 '쫌생이'가 되었다.

 

허리띠 풀어 놓고 배가 터지기까지 폭식하는 즐거움을 모르는 불쌍한 민족에게 싸고 맛있는 음식점을 차릴 재주가 있을 리 없다. 가이드북을 뒤집어 살펴봐도 내 형편으로 가 줄 만한 곳은 온통 이탈리아나 중국 음식점들뿐이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가장 불친절하다는 이유로 기네스북에 오른 중국 레스토랑 왕케이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 다 되었을까.

 

생선튀김에 감자튀김을 곁을여 내놓는다는 영국 대표흠식 피시앤칩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느글거린다. 창 밖으로 보이는 'Fish & Chips'라는 커다란 간판을 보면서 코웃음을 한번 쳐 주고, 냉장고에서 장어구이 초밥을 하나 꺼내다 쏙 집어 삼킨다. 꿀~꺽.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가짜시인, #유럽여행, #영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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