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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관광 후진국?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유럽여행객들은 성숙하지 못했다. 그저 런던 국회의사당과 시계탑, 로마의 콜로세움, 스위스의 만년설 덮인 산,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리의 박물관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강 훑기에 바쁘다. 그나마도 여행시기를 여름방학으로 잡는 터라 현지의 주민들은 다들 휴가를 떠나고 없어서 제대로 된 유럽인의 삶을 관찰할 수도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따로 없다. 진짜 유럽인들의 휴가는 그렇지 않다. 여기 유럽인들은…'

 

대강 이 정도 내용까지만 보고는 나는 가만히 익스플로러 오른쪽 위의 X 버튼을 눌렀다. 이미 닫아버린 창의 출처를 알아낼  방법이 내게는 없다. 하여간에 유럽 어딘가에서 아예 눌러 앉은 적도 있고, 여행 경력도 많고, 책도 좀 냈으니, 여기 저기 방귀 좀 뀌고 다니는 인사의 기사인지 인터뷰인지 블로그인지 하여튼 그 비슷한 무언가였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훨씬 잘나신 전문가분께서 쓰신 글이다. 그 분께서 지적하신 우리나라 배낭족들의 현주소라는 건 백번 맞는 말이다. 하루에 도시 한 개,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는 이삼일쯤, 한 달 동안 열개도 넘는 나라들의 유명한 볼거리들만 휙휙 보고 지나치곤한다. 이런 모진 스케줄을 배낭 용어로 '찍고 턴'이라 부른다.

 

'찍고 턴'은 내 운명

 

유럽을 겉도는 우리네 젊은 배낭족은 일단 대학생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우리가 장기간의 여행을 위해 낼 수 있는 시간은 여름방학뿐이다. 그나마 방학이라도 사실 영어시험이니, 자격증이니, 취업이니 괴롭히는 놈들이 많아서 여름방학마다 '떠나자'를 외치기도 참 쉽지 않다. 누가 이 나라를 이토록 아름답게 말아 잡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여간 대학만 졸업해서는 어엿한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가 아닌가.

 

유럽, 그 분만큼 자주 가지 못한다. 가까스로 돈을 털고 시간을 내어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더라도, 그 여행이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힘든 발걸음이었던 데다가 다음이라는 기약도 별로 없다시피 하니, 누구라도 조급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보고 더 느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던가. 타워브리지 보고 유로스타 타서 에펠탑 보고 야간열차 타서 콜로세움 보다 오는 '찍고 턴'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숙명이다.

 

그 분은 참으로 좋으시겠다. 유럽 어딘가에서 그렇게 현지인들이랑 함께 부대끼면서, 여름에는 그 사람들이랑 같이 남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의 해안가에서 한 20일 정도 짐 풀고 일광욕도 즐기고 풍덩풍덩 수영도 하고 책도 좀 읽고 산도 타고 시내의 레스토랑으로 나가서 포도주도 한잔 하면서 빈둥거릴 수 있으셔서.

 

유럽이라는 거대한 수박의 껍질만 혓바닥이 닳아 문드러져라 핥다가 온 나로서는 부럽기가 한량 없다.

 

물론 5공화국의 종식과 동시에 해외여행의 높은 벽이 뚫려서 '젊은이들의 유럽 배낭여행'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지도 이제 10년이 넘게 지났다. 중학교 때 문예반 선생님께서 던져 주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훌렁훌렁 넘겨 보다 재미 없다고 구석에 처박아 버리고, 보름치 용돈을 털어 전유성씨의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두 권을 다 사다가 낄낄대며 몇번이나 읽어댄 지도 얼추 10년이 지났다.

 

서점에는 그 10년 동안 쌓여온 온갖 여행기와 가이드북이 차고 넘친다. 포털 검색창에다가 '에펠탑'이라고만 치면 에펠탑의 유래에서부터 에펠탑에 관련한 에피소드들(난 에펠탑이 싫어서 에펠탑 위에 있는 레스토랑에서만 점심을 먹는다오. 여기서라면 에펠탑을 안 봐도 되거든)에다 직접 가서 찍은 사진들, 입장료와 개장시간, 엘리베이터 요금, 엘리베이터 요금 아끼려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가 죽을 뻔한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유럽은 여전히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다. 말장난이 아니라 한국에서 유럽은 정말로 너무 멀다. KTX가 뚫리면서 전국이 '하루 생활권'에 들어섰다지만, KTX가 아니라 KTX 할아버지 시베리아 초고속 횡단 열차를 만든다 해도 유럽이 가까워 질 날은 요원하다. 비행기 삯은 백만 원을 가볍게 넘기고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에 극심한 시차를 이겨내려면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삼일은 족히 걸린다.

 

가까운 곳에 사는 현지인들이야 매년 여름 우리가 지리산 설악산 가듯이 황금빛 모래사장 코스타 델 솔로 휴양을 떠나지만, 수천km 떨어진 꿈 같은 유럽으로 '일생에 딱 한 번' 갈까 말까한 우리는 제한된 시간 동안 부지런히 걷고 뛰고 야간열차 타면서 볼 거 다 보고 먹을 거 다 먹고 배울 거 다 배워가야 한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젊은 배낭족이라면, 해변에서 널널하게 여가를 부리는 여행은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로 생각 할 수밖에 없다. 원래 그렇다. 어쩔 수가 없다. 어떤 거인이 한반도를 삽으로 푹 퍼다가 프랑스 남쪽, 지중해 어디쯤에 모양새 좋게 꾹꾹 눌러 담아 놓지 않는 한, 한국 배낭족들의 '찍고 턴'은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유로피언이 아니라, 한국인이니까

 

그렇다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전혀 없다. 유럽이나 미국 친구들이 한국으로 여행 오는 경우도 똑같이 찍고 턴 한다. 하루는 용산국립박물관과 남대문 시장, 한강 유람선. 또 하루는 경복궁, 덕수궁, 광화문, 인사동에 남산타워 야경. 거기에 잘 해봐야 부산이나 경주, 제주도로 내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숨 가쁜 일정 대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혹은 다른 관심거리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여러가지를 알차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행기 타기 한참 전부터 그리스 신화도 보고 미술책도 보고 역사책도 보고 남의 여행기도 보고 지도 가이드북에 지도 펼쳐 놓고 머리 싸매가며 장밋빛 루트를 짜면서 희희낙락거리기도 해야 한다.

 

그저 남들 다 간다니 나도 가 보겠다며 예쁘게 꾸며서 거름 지고 따라 나서는 건 국제적인 '된장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 가는 곳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 세계를 주름 잡은 거대 문명의 보고, 유럽 아니던가.

 

아까도 밝혔지만, 그래 본 기자도 유럽 찍고 턴 했다. 2006년 6월 전역 직후 곧 죽어도 남들보다 잘난척하고 살아야 하는 성격이라 한국 배낭족의 평균 희망 일정인 30일보다는 조금 더 길게 다녀왔다. 50일.

 

남들 다 가는 런던 파리 로마 베네치아도 갔었고, 스코틀랜드나 안달루시아처럼 한국 배낭족을 도통 찾아 볼 수 없는 땅도 밟아 봤다. 원래는 당시에 한참 미쳐 살던 사진을 더 잘 찍어보기 위한 사진여행이 테마였는데, 막상 일정이 진행되면서 보니 사진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얻었다.

 

역사, 문화, 교육, 종교 등. 힘 세고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들을 직접 보다 보니 지금 우리 사는 모습도 비로소 눈에 들어 왔고, 결국에는 감히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기사까지 쓰게 되었다.

 

그래봐야 고작 유명한 관광지나 며칠씩 둘러다 본 하찮은 견문이 아니냐는 비판, 그 정도 경험을 가진 사람은 이 좁은 대한민국에도 수두룩 빽빽하다는 해묵은 비판에 미리 수긍하며, 중학교 시절부터 장장 10년 동안 계획한 찍고 턴의 자랑스런 결과물을, 여기에 내놓으련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가짜시인, #유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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