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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란 어떤 물건이나 지역의 가장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중심은 너무 밝다. 따라서 숨을 곳이 없다. 변두리에는 숨을 곳이 많다. 왜 숨을 곳이 많으냐고? 그곳엔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사람들, 도토리 키재기인 사람들이 사는 곳. 사는 데 도통하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래도 끼리끼리 모여 살면 조금이나마 그 두려움이 덜어진다. 생이 가진 비의(秘義)다. 그곳에 들어가 함께 섞이면 아무리 잘난 사람일지라도 장삼이사가 된다.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내 생은 늘 변두리를 찾아다녔다. 숨을 곳을 찾아서. 제법 대도시에 속하는 도시인 대전의 변두리. 산서동이라는 곳 어딘가에 보랏빛 자운영 꽃이 만발헀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운영이란 꽃 이름은 들녘 가득 피어난 모습이 마치 보랏빛 구름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어린 날, 논둑길에서 자주 보았던 꽃이다.

 

봄볕 좋은 날 오후, 잠시 틈을 내 꽃구경을 하러 길을 나선다. 변두리라는 마을의 성격에 혹하고 자운영이라는 꽃 이름에 끌린 것이다. 길섶, 공터에 가득 피어난 토끼풀을 본다. 토끼풀 역시 내 어린 날 추억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풀이다.

 

희귀하다는 건 외롭다는 뜻

 

토끼풀은 클로버라고도 부른다. 보통은 잎이 세 개가 어울려 하나를 이룬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잎이 네 장인 클로버도 있다.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다. 어디선가 나폴레옹도 우연히 말발굽 앞에 있던 네 잎 클로버를 보고 신기해서 허리를 숙이는 순간 총알이 위로 스쳐가서 산 적이 있다는 얘기을 읽은 적이 있었다.

 

어릴 적엔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하루 종일 풀밭을 찾아다니곤 했다. 희귀한 것, 돌연변이처럼 특이한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언제 어디서나 토끼풀밭을 보면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는 버릇은. 몇 년 전이었던가. 순천 선암사 경내에서 우연히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한 자리에서 수십 개를 찾아 내 시집 갈피에 넣어 두었다.

 

시집 갈피에 든 네 잎 클로버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희귀하다는 건 외롭다는 뜻을 포함한 거라는 걸. 외롭다는 것이 설령 높고 고귀하다는 걸 뜻할지라도 그것은 얼마나 커다란 시련인가. 이제 난 때때로 생각한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네 잎 클로버"라고. 아니, 나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네 잎 클로버다. 수많은 존재의 바다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행운을 얻었다는 점에서 보면 그렇다.

 

보릿빛, 외로움이 빚어낸 고귀함

 

마침내 침산동 입구에 닿는다. 끝없이 펼쳐진 자운영 꽃밭이 나그네를 반긴다. 때마침 들판을 불어가는 봄바람에 자운영 꽃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엊그제 시끌벅적한 축제가 끝나고 나서 찾는 이 없어 외로웠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식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버릇을 가진 나는 생각을 좀 더 진척 시킨다. 사람이 가장 외로운 때는 어떤 순간일까. 아마도 객지에서 오랫동안 떠돌다가 잠자리에 드는 때가 아닐는지. 그때는 여수(旅愁) 혹은 객수(客愁)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연화초(蓮花草)·홍화채(紅花菜)·쇄미제(碎米濟)·야화생 등으로도 부르는 자운영은 중국 원산 식물이다. 식물이라고 해서 여수(旅愁)나 객수(客愁)를 느끼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어쩌면 자운영 꽃이 가진 외로움은 그 여수가 빚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보랏빛은 외로움이 빚어낸 고귀함인지도 모른다.

 

자운영이 지닌 다섯 가지 덕

 

이젠 주로 논·밭 가장자리에 자생하는 식물이 되었지만, 자운영은 맨 처음 우리나라에 녹비 식물로 들어왔다.

 

나 어릴 적엔 화학비료가 아주 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엔 온 나라를 통틀어 비료공장이라곤 충주비료공장·나주비료공장 두 곳밖에 없었다. 그래서 꼴을 베어 쌓아두고 비바람에 썩혀 퇴비를 만들어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퇴비 증산이 여름 방학의 중요한 숙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럴 때 자운영은 유용한 식물이었다. 모내기 전 갈아엎어 거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자운영은 뿌리혹박테리아가 있는 콩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빨아들여 스스로 비료를 만든다. 그러므로 자운영 꽃밭은 천연 질소비료공장이다. 가을에 씨앗을 뿌려두면 싹이 터서 땅바닥에 달라붙어 겨울을 난다. 이듬해 봄이 되면 왕성하게 자란다. 그리고 나비꼴 모양의 보라색 꽃을 피운다. 그것을 봄에 갈아엎어 버리면 그대로 천연 비료가 되는 것이다. 자운영을 심었던 논엔 따로 요소나 유안 같은 화학비료를 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자운영은 다섯 가지 덕을 지녔다"라고. 봄이 되면 연보라색 꽃이 아름다워 볼거리를 주는 것, 제 몸을 주어 녹비로 쓰게 하는 것, 꿀이 많은 밀원식물로서 벌을 키우는 것, 어린잎을 조물조물 무쳐 나물로 먹을 수 있게 하는 것, 약용식물로 인후염 치료에 쓰이는 것. 자운영이 가진 이러한 미덕에 감탄한 한 시인은 이렇게 자운영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

 

자운영은 꽃이 만발했을 때 갈아엎는다

붉은 꽃이며 푸른 잎 싹쓸이하여 땅에 묻는다 

저걸 어쩌나 저걸 어쩌나 당신이 탄식할지라도

그건 농부의 야만이 아니라 꽃의 자비다

꽃 피워서 꿀벌에게 모두 공양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자운영은 땅에 묻혀

땅의 향기롭고 부드러운 연인이 된다

그래서 자운영을 녹비라고 부른다는 것

나는 은현리 농부에서 배웠다, 녹비

나는 아름다운 말 하나를 꽃에게서 배웠다

그 땅 위에 지금 푸른 벼가 자라고 있다

- 정일근 시 '녹비' 전문

 

논두렁이나 밭에 조금씩 돋아난 자운영이 아닌 대규모 자운영 꽃밭을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 경남 남해에서였다. 정일근 시인 또한 남해를 자주 여행하는 것으로 듣고 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저 시가 잉태된 곳은 남해일 것이다.

 

한없는 착취와 거룩한 희생 사이

 

자운영은 그렇게 기껏 만들어 낸 양분을 다른 작물에 빼앗기고 삶을 마감한다. 한없는 착취와 거룩한 희생 사이. 자운영의 한 살이는 그 두 가지 극단 사이에 걸쳐 있다.

 

한 마디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갈아엎어 져야 한다는 점에선 착취의 대상이다. 그러나 제 몸을 희생시켜서 다른 작물이 자랄 수 있게 하는 비료가 된다는 점에선 거룩한 희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자운영은 지난 시절 우리나라 농민들의 처지를 많이 닮았다. 자운영 속엔 오랜 착취의 대상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세계화와 FTA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만 우리 농민의 자화상이 뒤섞여 있다.

 

오늘, 자운영 꽃밭에 내리는 햇살은 너무 뜨겁다. 때로는 햇살도 물결의 일종이라면 오늘 내리는 저 햇살은 외세의 물결처럼 보인다. 다시 바라보니, 자운영 꽃은 애처로움과 지극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꽃이다. 이쯤에서 자운영은 꽃밭과 작별해야겠다. 애처로움보다 지극한 아름다움이 승(勝)한 바로 이쯤에서.


태그:#자운영 , #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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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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