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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계천 광장, 촛불을 든 중고생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TV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속에서 48년 전 김주열과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 내가 주변으로부터 수없이 들었던 소리가 새삼스럽게 내 가슴을 찔렀다.

 

"그 나이에 뭘 알끼고? 열사는 무슨…. 그냥 구경 나왔다가 죽은 아로."

 

내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촛불광장에서 다시 만난 주열이

 

1960년 3월, 주열이와 나는 막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른 후였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 3·15 시민항쟁의 대열에서 김주열은 경찰이 쏜 박격포탄처럼 생긴 최루탄이 오른쪽 눈을 뚫고 머릿속에 박힌 채 숨졌다.

 

시민들이 피흘리며 흩어진 자리에서 너무나 끔찍한 시신을 발견한 독재권력의 하수인들은 그들도 놀라 주열이 몸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먼 바다에 버렸다.

 

그렇게 김주열이 행방불명이 된 27일 동안 마산시민들은 간첩들의 사주를 받아 폭동을 일으킨 폭도들이었고 마산은 공포와 죽음의 도시였다. 

 

그러나 하늘이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바다 깊은 곳에서 밧줄이 풀려 돌이 떨어져 나간 주열이의 시신은 27일 동안  파도를 타고 홀연히 마산 중앙부두에 참혹한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중앙부두에 솟아오른 주열이의 사진 한 장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끝장냈다. 마산시민들은 4월 혁명의 주인공이 되었고 전북 남원에서 유학온 내 친구 주열이는 그렇게 해서 경남 마산의 은인이요, 전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참혹한 시신은 결국 잊혀졌다

 

그러나 바로 1년 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민주의 싹이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고 길고 긴 독재를 거치면서 그는 시민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이후 48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방자치단체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김주열을 기리는 기념물 하나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올해 3·15, 4·19 기념일을 맞아 우리 회원들과 함께 자그마한 기념 조형물을 하나 세우면서 가슴에 비수를 긋는 말들을 들어야만 했다. 내가 아는 그들의 공통점은 3·15의 시민항쟁을 폄훼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찬양한 문인의 기념관을 세우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탄생에 환호를 지른 자들이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의 황홀한 승리감과 붉은 악마의 애국주의 주술에 영혼을 점령당한 우리 국민에게 미선이·효순이가 미군탱크에 깔려 죽었다는 기사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이 끔찍한 미군 만행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던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신부님 한 분과 15m 높이의 3·15 기념탑 꼭대기에 올라가 성조기를 불태우는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 때도 수구세력들의 공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 만행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그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만일 지금 미국 소의 광우병을 알린답시고 그런 행동을 한다면 순수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촛불집회에 찬물을 끼얹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촛불문화제 나가지 못하는 까닭

 

이런 사연을 가진 전력 때문에 행여 배후세력이라는 바가지를 뒤집어쓸까 봐 광우병 촛불문화제 근처에 얼씬거릴 수조차 없다. 내 과거사가 내 발목을 잡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한나라당 지지세력들이 어깨에 힘주고 설쳐대는 내 고향 땅에서, 기가 꺾여 의욕조차 상실한 나를 촛불문화제로 자꾸만 유혹하고 선동하는 나의 배후세력은 놀랍게도 귀엽고 기특하기만 한 어린 학생들이다.

 

너희들은 48년 전 주열이와 내 친구들의 모습이다. 아, 이렇게 강렬한 유혹을 받아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고맙다 얘들아!

 

덧붙이는 글 | 김영만 의장은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회장과 코리아평화연대 의장 등을 맡고 있다.


태그:#김주열, #광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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