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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장편소설 <쿨하게 한걸음> 책 표지.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장편소설 <쿨하게 한걸음> 책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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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형 소설로선 '딱'이다. 읽으려면 이 글을 보는 지금, 보는 게 가장 좋다. 특히 직장을 다녔다가 그만두고, 지금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글귀 하나하나가 가슴팍에 꽂혀 시큰거리게 한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에피소드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실제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모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지독한 외로움 말이다. 작가 서유미는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그들만의 말 못할 아픔을 담아냈다.

한국 나이 서른. 우스갯소리로 '계란 한 판'이라고 불리는 때다.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한창 직장에 다닐 나이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학교 도서관 등을 서성대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연수도, 수년째 나이가 차 어쩔 수 없이 고시공부에 몰두하는 동남도. 그게 현실이다.

"잃어버린 10년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잘못된 몇 정치인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며, 서로를 헐뜯는다. 작가는 적어도 누구 탓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맞춰 살아가는, 보통의 우리 모습을 그렸다. 그래서 더 좋다.

소설은 연수가 남자친구 K와 헤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때 나이 서른둘. 다니던 회사는 사정이 어려워 직원들을 무참히 솎아내고 있다. 연수 아버지는 정년퇴임 뒤 취업사이트를 두드리며 일할 곳을 찾고 있는 상황.

사촌 동생 연재는 학창 시절 유명한 '날라리'로 통했지만, 지금은 돈 많은 남자 만나 떵떵거리며 잘 산다. 겉으로만 봐도, 참 비교된다. 사춘기 시절 삶과 죽음, 가족 등을 고민하며 살았던 자신을 두고 "한없이 어리석었다"며 자평하기도 한다. 자칫 30대 여성의 재미없는 인생 넋두리로 끝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만약 그랬다면, 당장에라도 내동댕이쳐 버렸을 것이다.

본격적인 재미는 그 이후부터다. 누가 봐도 암울한 상황인데, 연수는 담담히 현실에 맞선다. 백수 생활 속에서도 자기만의 낙(樂)을 찾는다. 이때부터가 우리네 백수들의 공감을 100% 이끌어낸다. 백수 생활 첫날, 출근 시간 맞추려 빽빽한 지하철에 몸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2년 만에 다시 밟은 대학 교정,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임에 감사한다. 공부 좀 해보려 도서관 입구에 들어섰더니, "학생증이 없으면 입장 불가"라 좌절한다. 졸업생을 냉대하는 것 같아 못내 섭섭하기만 하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겪는다. 점심때만 되면, 회사서 함께 했던 '밥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밖이 어두워지면, 시원한 맥주 한 잔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옛 기억에 회사 친구와 술자리를 갖지만, 밍밍하기만 하다. 이유는? 작가는 "퇴근 후 피로, 서로 익히 아는 인간에 대한 부글부글한 증오라는 안주가 없는 술자리는 소주병에 담긴 맹물처럼 밍밍하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느덧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환갑잔치를 할 때가 됐다. 회사는 잘렸지, 어쩔 수 없이 적금 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다. 연수 이모 표현에 따르면, '딸라 빚'(달러 빚)을 내 잔치를 치르는 것이다. 연수의 답답한 마음은 애절한 대사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그리워진다."
"요즘 같아선 정말 아무 데나 처 넣고 싶다."

이 글귀만 봐도, 이 소설이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한 이유를 눈치 챌 수 있다. 당시 심사위원은 "소설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실감과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을 신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소설은 암울하지 않다. 외로워도, 슬퍼도, 연수는 울지 않는 탓이 크다. 글 말미에, 새로 사귄 '밥 친구' 동남이 안타깝게 세상을 등지는 것은 물론 예외다.

다 좋다. 정말 다 좋지만, 이것만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이없게도, 맞춤법 때문이다. 특히 '쌍시옷'(ㅆ) 표현을 유독 틀린다. '액쎄서리'가 아니다, '액세서리'다. '메씨지', '콘써트', '웹싸이트'는 틀리고, '메시지', '콘서트', '웹사이트'가 올바른 표현이다. 적어도 현행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말이다. 이뿐이면 말도 안 한다. '어씨스트(어시스트)', '쑈핑(쇼핑)', '씨나리오(시나리오)', '유니베씨티(유니버시티)' 등 수없이 많다.

작가가 잘못 썼으면 출판사가 바로잡는 게 기본이다. 책도 결국 서비스 산업이다. 읽는 사람에게 적어도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돈을 내고 책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펴낸 곳 (주)창비. 값 9800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기자이야기](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창비(2008)


태그:#쿨하게 한걸음, #서유미,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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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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