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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막내 동생은 아침마다 엄마와 함께 등교한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 구로구. 12년 전에는 학교에 가려면 산길을 넘어 왕복 1시간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산길이 반듯하게 닦여 30분이 5분이 됐다. 상가와 아파트도 들어서 밤중에도 많은 사람이 길을 오간다.

그런데도 엄마는 불안하단다. 그래서 5분 걸리는 거리를 매일 같이 데려다 준다. 하굣길엔 직장에 다니는 엄마 대신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배턴을 이어 받는다. 출근하기도 바쁜 50세 엄마와 계단 오르내리기도 불편한 79세 할머니는 왜 매일같이 등하교를 해야 하는 걸까?

그제는 할머니를 대신해 마중을 나갔다. 이미 교문 앞엔 아이들을 '모시러' 온 '보디가드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얼마 전 일산, 안양 유괴사건 이후로 교문 앞 엄마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하교 시간, 아이들 소리로 가득 차야 할 운동장 벤치가 엄마들 모임 장소가 됐다.

잇따르는 아동성폭력범죄에 불안한 학부모들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엄호해갔다.
▲ 하교 후 텅 빈 학교 잇따르는 아동성폭력범죄에 불안한 학부모들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엄호해갔다.
ⓒ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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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가드맘, "무서워서 어디 내보내겠어?"

2, 5학년 자매를 둔 이원희(주부)씨는 "주로 등∙하굣길에 일이 생긴다던데, 무서워서 어디 내보내겠어? 그래도 학교는 보내야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왔다갔다 하는 거지"라며 학원도 통학버스를 운영하는 학원만 보내고 있다고 한다.

막내 동생과 같은 반인 남자아이 엄마도 있었다. "민성(가명)이는 혼자 다녀도 되지 않아요?"라고 물었더니, 김지현(주부)씨는 "모르는 소리 마. 요즘은 남자애들도 위험해"라며 불안감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는 교문 앞에 뻔히 엄마들이 서있는데도 왠 낯선 이가 혼자 있는 남자아이에게 다가가더란다. 보디가드맘끼리는 매일 보는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 얼굴이 익숙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수상해 아이 엄마인 척 다가갔더니 놀라서 도망 갔다고 한다. 일산·안양 유괴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잇따르는 아동성폭력범죄에 불안한 학부모들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엄호해갔다.
▲ 하교 후 텅 빈 학교 잇따르는 아동성폭력범죄에 불안한 학부모들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엄호해갔다.
ⓒ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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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예방책은 '땜질식 처방'

연일 정부의 개선된 아동성폭력범죄 예방책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데, 왜 학교 앞 엄마들은 늘어만 가는 걸까?

경찰청 '성폭력 피해 신고 현황' 통계에 따르면 13세 미만 아동의 성폭력 사건은 2003년 642건에서 2007년 1081건으로 증가했다. 최근 아동성폭력사건이 잇따르자 교육과학기술부는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증설, 성범죄자 형량 강화 등의 '아동·여성 보호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미 시행 중인 것들을 나열한 수준이라며 '땜질식 처방'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교문 앞 '보디가드맘'들도 여전히 미흡하다는 의견이었다.

"인력∙시설 부족 때문에 도움 주지 못할 때 가장 속상"

해바라기아동센터(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김소향 사회복지사는 아동 성폭력 범죄사건 대책에 대해 "피해가족 지원, 학교 내 성폭력 예방 교육 프로그램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해바라기아동센터는 성폭력 피해 아동에게 상담, 의료진단 등 종합적인 지원을 해주는 여성부 산하 단체다. 지난 해 이곳을 찾은 성폭력 피해 아동은 632명. 한 아동이 모든 지원을 받으려면 일곱 번 이상 방문해야 한다.

그에 비해 시설이나 활동가는 턱없이 모자라다. 상근자는 김씨를 포함해 11명이 전부다. 김씨도 "가장 속상한 것은 대기 인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미처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가장 힘들다"라며 안타까워 했다. 이렇듯 인력, 시설이 부족하다 보니 장기적인 예방, 교육 프로그램까지는 손이 닿을 수가 없다.

성폭력 피해 아동을 지원하는 여성부 산하 단체다.
▲ 해바라기아동센터 성폭력 피해 아동을 지원하는 여성부 산하 단체다.
ⓒ 김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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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성폭력사건이 일어날 경우, 피해 아동뿐만 아니라 피해 가족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원책은 전무하다. 가장 중요한 '사전 예방 교육'도  미흡한 건 마찬가지다. 현재 성교육 강사, 어린이집 원장, 경찰, 사법연수생에 대한 교육은 이뤄지고 있으나, 정작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예방교육 프로그램은 미미한 수준이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 대해 의원들은 오는 14일 확실한 대책을 재보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교문 앞 '보디가드맘'들은 매번 그랬듯 기침만 멎게 하는 진통제식 처방전만 내놓을 걸 알면서도 우리 아이들의 안전과 미래가 걸린 일이기에 또 다시 기대해 본다.


태그:#아동성폭력, #해바라기아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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