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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장자는 아직도 나같은 사람에게는 다가서기 어렵다. 특히 절대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노장사상이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상과 신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노장사상은 분명 '함께'와 '무욕'이라는 삶을 지향하는 의미에서 접하는 일은 매우 귀중한 만남이다.

 

돈에 정신을 팔고, 개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를 파괴하는 우리 시대 <노자>는 분명 귀중한 가르침을 준다. 노자를 접한다고 절대신앙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기에 노자가 말하는 인간과 자연,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더 풍부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는 장일순과 이 아무개 목사(이현주 목사)가 노자의 <도덕경>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원래 이 책은 1993년 상권, 중권이 나왔고, 1995년 하권이 나왔는데 2003년 개정판으로 나오면서 3권을 한 권을 합쳤다.

 

그들은 도덕경 그 '본문'을 주석 註釋하지 않고, 그가 당신의 '말씀'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무위당 장일순은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에서 공부하던 중 한국전쟁 때 고향 원주에 돌아와 40여년간 원주를 떠나지 않고 '한살림운동'을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의 정신 세계를 바른 길로 지도하는 데 여생을 보냈다. 특히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천주교 원주교구의 선구적 저항, 가톨릭 농민회의 민중 운동, 김지하 시인의 투쟁은 장일순 선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그는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육신 장막에서 벗어났다.

 

장일순과 이현주 목사는 '말씀'을 진지하고 따뜻하게 나누었다. 어떤 때는 서로 인격이 다르고, 한 몸이 아니었지만 나누는 말씀이 서로 일치하여 자리를 함께 한 그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 경험까지 한다.

 

하지만 대담을 정리한 이현주 목사는 읽는 이들에게 말한다. "명심해 둘 만한 문장이라곤 단 한 구절도 없다"고. 노자가 어려운 이유가 노자가 말한 내용을 풀이하고, 풀이한 그것을 절대로 받아들이는, 이미 '도'를 말하면 '도'가 아니라는 말처럼 해석되고, 주석한 문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하기 때문이다.

 

"불상현(不尙賢)하여 사민부쟁(使民不爭)하라"는 말을 장일순과 이현주는 잘난 사람을 떠받들지 않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라고 말한다. 잘난 사람을 떠받는 것은 결국 그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잘난 사람만 받들고, 존중하면 결국 경쟁과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다. 장일순과 이현주는 특히 이 대목을 기계문명을 정곡으로 찌른다고 했다.

 

"자연에는 경쟁이라는 것이 없지 않나?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 잘난 것을 받들게 되면 저절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인 거라. 기계 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능률과 효과를 최고 가치로 치지 않는가? 기계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고 오로지 그쪽 방향으로만 치닫게 마련이거든. 그러나 그렇게 됐을 적어 뭐냐 하면 천리(天理)라든가 자연의 법도에서 멀어지게 되는 거지. 자연의 일체만상이 서로 불가분의 연대 관계 속에 있는 건데 거기서 벗어나 자꾸 멀어지게 되니까. 그런데도 그걸 좋은 것으로 여기고 자꾸만 벗어나니까, 결국 미쳐서 자멸하게 되는 것 아닌가?"(59쪽)

 

성공과 경쟁, 경제논리에 함몰되어버린 우리들 삶을 찌른다. 풀을 먹고 되새김질하는 소에게 닭과 동료가 남긴 고깃덩어리로 만든 사료를 먹여 미친소를 만들고, 미친소를 수입하는 대한민국 정부이다.

 

생명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생명을 자본과 경쟁에 팔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그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니 더 비참한 것이다. 이익이 아니라 자신과 자연 모두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권력, 돈, 학력으로 채워 넣기에 바쁘다. 그리고 아직도 배고프다고 외친다. 이 탐욕을 향하여 장일순과 이현주는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괴 거기가 비어 있어서 그릇이 쓸모가 있다고." 말한다. 가득 차 있는 그릇은 쓸모가 없다. 더 담을 수 없다. 하지만 빈 그릇은 쓸모가 있다. 담을 수 있기에 그렇다.

 

"사심을 버리고 살아가라는 그런 얘기지.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 유(有)에만 사로잡혀 있거든. 형태에만 잡혀 있지, 사람도 자기 생각이나 고집으로 가득 차 있으면 쓸 수가 없겠지요. 쓸 수가 없지. 그런데 오늘에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전부 일을 다 하잖아? 그러니까 자꾸 왜곡돼 갈 수밖에. 옳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설쳐대지 않는 마당이 없는 것 같아요. 정치 · 경제 · 문화 · 사회 · 종교까지 다해서, 모든 분야에 그런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요."(153쪽)

 

가득 차 있는 최고라 여기는 우리들에게 '비움'을 말하고 있다. 만족하지 못하고, 채워 넣기이 바쁜 우리가 새겨야 할 말들이다. 부자가 진정 가난한 자요, 가난한 자가 진정 풍요한 것임을 우리는 모르고 살아간다. 강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겨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아파트를 지어야 하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논과 밭을 산다. 이유는 탐욕에 자신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유학자 김장생(金長生)은 시조 한 편을 이엃게 읊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어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446쪽)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만큼 큰 화가 없다고 했다. "화막대어부지족(禍莫大於不知足)".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더 큰 잘못, 죄가 없다고 했다. 초려삼간만 있어도,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이라는 지족의 삶을 추구했던 김장생 시조가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뜬구름처럼 들릴 수 있지만 왠지 마음을 휘몰아치게 한다.

 

사실 미친소가 생긴 이유는 인간이 만든 탐욕 때문이다. 미친소를 값싸다고 수입하는 것도 탐욕때문이다. 그러니 죽음밖에 더 무엇이 남겠는가? 탐욕이 자기를 배부르게 할 줄 생각하지만 생명은 참혹하게 죽이는 일인줄 모른다.

 

"민불외사(民不畏死)에 내하이사구지(柰何以死懼之)"이라 했다. 백성들이 죽는 걸 겁내지 않는데 어떻게 죽이는 걸로 그들을 겁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인민이 죽어가는 데도 다스리는 자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인민이 미친소 때문에 죽어가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은 값싼 쇠고기를 먹게 되어 좋다고 한다. 인민을 죽음으로 내몰고서도 미친소를 먹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탐욕에 찌든 대통령이다. 탐욕에 찌든 대한민국 관료, 그리고 자본가들, 미친소도 먹어도 된다는 이상한 학자들이 인민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는 탐욕때문에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한 일갈이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부드럽지만 칼보다 더 예리하게 탐욕에 찌든 가슴을 도려낸다. 한 장 한 장씩 읽어가시라.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가슴에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 <노자 이야기 : 무위당 장일순의> 장일순,이아무개 공저 | 삼인 | 2003년 11월 ㅣ25,000원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장일순 지음, 이아무개 (이현주) 대담.정리, 삼인(2003)


태그:#장일순,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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