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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람보다 더 조선을 괴롭히는 조선 사람

정명수. 그는 조선인이다. 그러나 청나라 사람보다 더 조선을 괴롭히는 조선 사람이다. 평안도 은산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을 수령의 핍박과 학대를 받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 후금을 치기 위한 조명 연합군에 편성되어 청나라에 원정했으나 조선사령관 강홍립 장군은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항복하고 정명수는 포로가 되었다.

청나라 언어를 터득한 그는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정명수의 변신은 이때부터다. 철저하게 조국을 배신한 정명수는 정묘년과 병자년 두 차례의 조선 원정에 역관으로 선봉에 섰다. 조선 임금을 자신의 신하처럼 대하고 대소신료들을 하인 취급했다. 영의정이 자신의 바지를 붙잡고 설설 기도록 만들었다.

조선을 수시로 드나들던 정명수는 돌아가는 길목 수령들을 괴롭혔다. 여자를 더 많이 내놓으라는 것이다. 기녀들은 죽음으로 항거했고 고을 수령들은 전전긍긍했다. 발길질은 예사였으며 칼을 빼들고 위협했다. 횡포에 지친 수령들이 묘당에 장계를 올렸다. 고을방백이 정명수에게 시달린다는 보고를 받은 임금은 속수무책이었다. 수령들은 양녀를 붙잡아다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신경진의 건의로 정명수에게 상을 내렸으나 별무효과였다. 정주 관노(官奴)로 있던 정명수의 처남 봉영운에게 벼슬을 내리는 웃지 못 할 일까지 벌였으나 정명수의 행패는 그치지 않았다. 조정은 논란 끝에 청나라의 조선통 용골대와 마부대 그리고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기로 결정하고 은 2600냥과 잡물 7바리를 보냈었다. 이것이 말썽이 된 것이다.

압록강 표지석.
▲ 압록강 압록강 표지석.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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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서 시한폭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최명길은 의주관에 머물고 있었다. 이제 압록강을 건너면 청나라 땅에 들어간다. 사신 길을 떠나면서 마지막 보았던 임금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이 들어가면 저 나라가 대우하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다를 것입니다만 세자가 돌아오도록 꾀하려면 상후(上候)가 미령하시다고 간청하려 합니다."

"중전(中殿)의 재기(再朞)를 말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여기에서 인조와 최명길의 생각이 갈렸다. 최명길은 세자 환국을 위해서 임금의 건강을 거론해야 좋다고 주장했고 임금은 자신의 병환을 핑계하는 것은 세자 환국에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빌미가 되어 왕위를 내 놓으라 할까봐 두려웠다. 결국 윤허를 받지 못하고 떠났다.

'세자를 모셔 오려면 인열왕후 대상 정도는 청나라에 통하지 않을 것이다. 청국의 구미에 당기는 더 강력한 구실이 필요하다. 고쳐 쓰려면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고쳐야 한다. 청나라 땅에 들어가면 지필묵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세작이 따라 붙을 것이다. 세자관에 하룻밤 묵은 후에 황제를 알현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명나라의 홍무제가 당률을 기반으로 제정한 법률. 조선은 명나라의 법률을 들여와 그대로 시행했다. 사형에도 교형, 참형, 능지처사가 있는 무서운 법률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대명률. 명나라의 홍무제가 당률을 기반으로 제정한 법률. 조선은 명나라의 법률을 들여와 그대로 시행했다. 사형에도 교형, 참형, 능지처사가 있는 무서운 법률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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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조선에서 사신이 오면 동관에 묵게 하고 세자관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최명길은 망설였다. 고칠까? 말 것인가? 옥새가 찍힌 주문(奏文)을 고치는 것은 국서 변조다. 대명률에 의하여 처단될 수 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국서변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변조된 국서를 가지고 내가 역적질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국가와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못할 바도 아니지 않은가.'

최명길은 결심했다. 주문을 펼친 최명길은 인열왕후 대상 부분을 빼고 임금의 환후를 집어 넣었다. 국서를 변조한 최명길은 압록강을 건넜다. 심양에 도착한 최명길은 동관에 들었다. 세자관에 사람을 보내 심양의 사정을 알아보고 싶었으나 청나라는 철저하게 차단했다.

최명길은 황궁으로 황제를 알현했다. 홍타이지도 정중하게 맞이했다. 주문을 올리고 선물을 풀어놨다. 황제는 뇌물사건에 대하여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세자 환국에 대한 주청도 언급이 없었다. 그야말로 요식적인 외교 행위였다. 황궁에서 돌아와 동관에 대기하고 있는 최명길에게 호출령이 떨어졌다. 예부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최명길을 부른 사람은 범문정이었다.

"대 청국과 조선은 형제의 나라가 아니오. 군신의 나라란 말이오. 그 사실을 잊었소?"
"군신의 예로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청나라의 전략가 범문정과 조선의 전술가 최명길이 기싸움을 벌였으나 승패는 이미 예견된 싸움이었다. 청나라는 상국이라는 우월적 지위에 있고 조선은 항복한 나라다. 범문정은 황제의 스승이라는 별칭이 붙으리만큼 홍타이지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고 최명길은 아직 대명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임금과 신하들에 포위된 재상이다.

창덕궁의 정전이다.
▲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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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악조건을 모르는 최명길이 아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속담이 있듯이 청나라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으로 재주를 넘도록 하고 실리를 챙기자는 것이 최명길의 전술이었다. 주문 한 장 들고 압록강을 건너왔지만 돌아갈 때는 빈손으로 압록강을 넘지 않겠다는 계산이다.

"그러한 나라가 이런 방자한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세자가 여기에 와있는 것은 군신의 예를 지키기 위한 신뢰의 징표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오?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여기에 남겠다고 해야 마땅할 터인데 보내달라고 청하니 온당한 일이오?"

"세자 저하와 빈궁께서 여기 들어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당에 감히 돌아갈 것을 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3년 상을 마치는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당신네 조선은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충효를 따지다가 망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소? 나라가 있어야 효심이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오?"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가가 경각에 달려있을 때 신주를 먼저 강화도에 보냈습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라군요. 신주가 나라를 지켜준다 합디까? 신주가 망한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다 합디까?"

범문정은 명나라에서 학문을 닦은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도 공자와 맹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청나라에 붙은 이유가 있다. 명나라는 충효를 내세우는 세력가들이 농민을 수탈하는 반면 청나라는 전쟁승리의 과실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주는 정책 때문이었다.

몽고 정벌군을 일으킨 누르하치를 따라 몽고 황궁의 화려함을 목격했다. 조선 정벌에 출정하지 않았지만 돌아온 장수들의 입을 통하여 창덕궁과 경덕궁의 화려한 규모를 들었다. 몽고와 조선의 패망은 사필귀정이라고 판단했다.

청나라 황궁의 정전이다.
▲ 숭정전. 청나라 황궁의 정전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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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휩쓰는 청나라의 심양궁은 소박하고 협소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범문정은 청나라가 중원을 거머쥘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기층민을 외면한 명나라는 농민 반란으로 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세자 저하께서 한성을 다녀오시는 것은 불과 몇 달이면 됩니다. 다녀오시는 동안 빈궁은 여기에 계실 것 입니다."

공맹논쟁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최명길은 화제를 바꿨다.

"강빈을 여기 두고 혼자 다녀온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빈궁마마와 대군은 여기에 계실 것입니다."

역시 화제 바꿈은 주효했다. 조선 영의정을 몰아붙이던 범문정이 관심을 보였다. 청나라는 부모 공경보다도 여자를 끔찍이 아끼는 나라다. 전쟁터에도 부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흉이 아니었다. 범문정이 숙고에 들어갔다.


태그:#소현세자, #최명길, #범문정, #압록강,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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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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