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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오전, 윤인구·황정민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KBS 제1TV '여성공감'을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출연자들의 수다도 맛깔스럽지만, 적절한 시기에 끼어드는 진행자들의 재치가 별미라서 즐겨보고 있습니다.

 

호탕한 웃음이 매력인 작곡가 이호섭, 요리연구가 이혜정, 여성학자 오한숙희씨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출연해 조선시대 유교 사회를 벗어난 '현대판 칠거지악'에 대해 논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호흡하며 웃고 즐길 수 있는 TV 프로그램은 생활에 양분과 같은 역할을 하지요. 전화를 받느라 끝까지 시청은 못 했지만, 잘못된 관념과 편견들을 지적하며 풀어가는 그들의 수다는 부부가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남편과 아내의 처지를 대변했습니다.    

 

'부부가 맞벌이 하는 시대이니, 비자금을 조금 챙기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요리연구가 이혜정씨의 비자금 찬성론을 흥미 있게 듣고 있는데, 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몇 차례 울리기에 허겁지겁 달려가 받았습니다.

 

"자기야? 나야, 나! 휴대폰은 왜 꺼놨어?"

"어메! 전화를 다하고, 어쩐 일이여? 지금 TV보고 있는데. 휴대폰은 꺼놓은 게 아니라 아직 열어놓지 않은 거지.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이라고 아침 일찍부터 열어놓고 있냐고··."

"어쩐 일은, 나 오늘 이브닝(오후 근무) 끝나면 부산에 가려고. 밤 11시에 끝나니까 바로 출발하면 새벽 3시쯤 도착하겠네. 내일은 쉬고 모래 나이트(밤 근무) 들어가거든. 그러니 그렇게 알고,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아침부터 까치가 창밖 은행나무에서 '까악' '까악' 울어대더니, 부여에 있는 아내가 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도로가 한가롭긴 하겠지만, 밤길 운전이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걱정하면서도 얼마나 좋던지···. 

 

밖에만 나가면 집으로 전화하는 걸 고양이 물 싫어하듯 하던 아내가 "휴대폰을 왜 꺼놓았냐?"라고 다그칠 정도로 변했으니, 떨어져 사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오래 살다 보면 손자 턱의 흰수염도 본다'라는 속담이 떠오르더라고요.

 

손님맞이 준비에 들어가다

 

전화를 받느라 재미있게 시청하던 '여성공감'을 못 봤지만, 짜증은커녕, 짝사랑하던 옆집 아가씨와 방앗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떠꺼머리 총각처럼 가슴이 뛰더라고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손님맞이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아내도 손님인데 깔끔하게 하고 맞는 게 예의일 것 같아 샤워도 하고 면도도 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다 봄을 상징하는 과일인 딸기와 양념 삼겹살, 그리고 아내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와 햄버거를 사오기로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마음이 상쾌하니까 발걸음도 가볍고, 열 몇 시간 후면 만날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만개한 백목련과 벚꽃을 보면서도 외로움을 느꼈는데, 전화가 왔으니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한참 물이 오른 가로수들의 연두색이 더욱 짙게 보였습니다.  

 

순두부찌개는 다음에 먹기로 하고 삼겹살을 사려고 정육점에 들렀습니다. 제 표정이 평소와 달리 보였는지, 주인이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묻는데, 그저 멋쩍게 웃기만 했습니다. 아내와 만날 생각을 하니 좋아서 그런다는 말을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양념 삼겹살을 사가지고 오면서, 둘이서 이틀 동안 먹을 딸기도 한 바구니 사고, 새벽에 도착하면 먹을 샌드위치도 2인분 샀습니다. 장을 보고 나니까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시계만 들여다보며 몇 시간 후면 도착하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아내의 '김빠지는 대답'

 

집에 돌아와 가볍게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뒤 집안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해줄 서류와 우편물도 챙겼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을 딸기도 씻어서 샌드위치와 함께 상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손님맞이 준비를 끝냈습니다. 

 

 

잠자리에 들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아내가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릴 때의 반가움과 흥분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운전하느라 피곤해서 곧장 잠자리에 들어야 했거든요.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자동차 정밀검사를 받지 않으면 몇백만 원의 벌금을 물게 되기 때문에 검사를 받으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저를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다고 하는데, 감동이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집에 오게 된 사유는 더 따질 필요가 없고, 준비한 음식이나 맛있게 먹고 갔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해서 함께 구워먹을 삼겹살과 샌드위치도 사왔다며 딸기를 먹어보라며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밖에 있는 샌드위치를 가져다 먹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무슨 딸기야? 나는 이거보다 더 싱싱한 딸기를 병원에서 많이 먹는데·· 그리고 부여 딸기가 맛도 좋다고."

 

몇 개라도 먹어주던가, 살짝 비켜서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자기 대접하려고 사온 딸기인데··· 병원에서 많이 먹었고, 부여 딸기가 좋다며 외면했어야 하는지, 한마디로 김빠지는 대답이었습니다.

 

실컷 먹게 된 '딸기'와 '양념 삼겹살'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 자동차 정비를 하러 나갔습니다. 친정어머니에게 선물도 전해 드리고 여기저기 볼일을 보느라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마주앉아 구워먹으려고 사온 양념 삼겹살도 저 혼자 먹어야 했습니다.

 

늦게 들어온 아내는, 마음먹고 사온 딸기이니 맛 좀 보라고 성화를 대도 쳐다보지도 않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먹는 시늉이라도 해줘야지, 야속하더라고요. 아내는 샌드위치만 맛있게 먹고, 삼겹살과 딸기는 그대로 남겨놓은 채 아침 일찍 부여로 갔습니다. 고민 끝에 준비한 음식들인데 허망하고 허전하더라고요.

 

삼겹살이야 반찬으로 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딸기는 돈 주고 샀으니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자라서 이틀은 먹어야 될 것 같은데, 비싼 딸기 먹느라 고생 좀 할 것 같습니다. '배불러 부대끼는 것보다는 몇 끼니 굶는 게 낫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으니까요.

 

딸기를 먹어대느라 고생스럽다고 호소하는 것도 아내의 덕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온다는 연락이 없었으면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니까요. 더구나 봄이 다 가도록 먹지 못했던 딸기니 고마운 마음으로 실컷 먹어야겠습니다. 혼자 먹기 외롭긴 하지만요.


태그:#아내,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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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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