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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학교 자율화 조치 발표에 학생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우리 학교 0교시해요? 그러면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잠은 언제 자요?"

"자기들이나 아침밥 굶고 5시 일어나서 11시까지 책상에 앉아 일하라고 그래요."

"우열반 하면 1등부터 35등까지는 1반이고 나는 10반이에요? 그런 게 어딨어요?"

 

우리 아이들의 80~90%는 이 학교자율화 조치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학교는 안 할지도 모른다"고 답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은 안 할 수도 있지만 다른 몇 학교만 시작하면 결코 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규제를 통해 보호되는 자율이 있다는 걸 MB는 정말 모를까?

 

규제를 철폐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번 4.15 학교 자율화 조치는 잘못된 도그마에서 나온 탁상공론이다. 모든 규제는 나쁘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규제에는 좋은 -그래서 꼭 필요한- 규제가 있고, 나쁜 -그래서 없어져야 할- 규제가 있다. 또한 규제가 언제나 모든 자율권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율권을 보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있다.

 

교통 규칙은 규제이지만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규제이다. 그린벨트와 상수원 개발 제한은 규제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맑은 공기를 숨쉬고 깨끗한 물을 마실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무릇 많은 법과 제도라는 것 자체가 일부를 제한함으로써 다수에게 더 많은 자유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진정 모든 규제가 없어져야 한다면 대한민국 헌법부터 부정해야 한다.

 

0교시와 야간강제보충을 금지하는 지침이 어떻게 철폐되어야 하는 규제인가? 서울대반과 대포반으로 낙인찍는 우열반을 못하게 하는 지침이 왜 과도한 규제인가? 촌지를 받지 못하게 한 지침을 어찌 없어져야 할 규제로 매도하는가? 학생이 종교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가 어떻게 사라져야 할 규제 항목인가? 무분별한 비정규직 교원 채용을 제한하고 이들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 과연 학교장과 이사장의 자율권 침해인가?

 

이번에 교육과학기술부가 규제라는 이유로 없애버린 29개 지침 중 많은 것들은 학교의 자율권을 제한하는 규제라기보다 학생과 교사들에게 더 많은 자율권을 보장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많다. 과연 MB와 교육과학부는 자율권의 보호를 위하여, 또는 더 많은 자율권을 보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규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까?

 

핵심은 '누구의, 누구를 위한 학교 자율화인가'이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쓸데 없이 제한하고 있는 것을 풀어서 학교가 자율권을 가지게 하는 정책 방향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번 교과부의 자율화 조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규제를 없앤다는 미명 하에 반드시 필요한 규제, 더 나아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까지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학교 자율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지향점이 잘못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말로는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하고, 교육의 주체를 교사-학생-학부모라고 하면서 이번 조치에서는 교육주체들의 자율과 권리를 깡그리 박탈해버렸다.

 

'0교시 부활, SKY반 합법화, 야간 강제보충 실시, 종교과목 선택 폐지, 기간제 교사 채용 제한 폐지'가 과연 학생들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것이며,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학생회, 교사회, 학부모회 등 교육주체들의 자치기구도 법제화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이번 조치로 인하여 신장된 것은 교사와 학생의 자율권이 아니라 학교장과 이사장의 자율권일 뿐이다.

 

이렇게 학교장과 이사장 그들만의 자율권 신장으로 학생과 교사들은 자율권과 최소한의 생존권적 인권도 박탈당할 처지에 놓은 것이다. 잠 잘 권리와 밥 먹을 권리, 그리고 종교 선택의 권리, 차별받지 않은 권리 등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의 기본권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차라리 교육부 없애고 등록금과 교사 증원이나 해결하는게

 

학교의 주인은 교장 선생님이 아니며 사립학교라고 해서 이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학교 자율화란 학교장과 이사장의 권한을 무한대로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자유와 권리, 교사의 수업권으로 대표되는 교육주체들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민주주의 사회의 진정한 자율권이다.

 

그래서 우리 학생과 교사들은 한 목소리로 요구한다. 농담이 아니라 서슬 퍼런 진심으로…

 

"이번 정책 입안한 교육부 높으신 분들이나 아침 밥 굶고 잠 안 자면서 책상에 앉아서 국민을 위해 일해라. 그러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이번 자율화 조치로) 할 일 없어진 교육과학부는 스스로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학생들 등록금이나 내려주고 교사 정원이나 늘려 달라."

덧붙이는 글 | 김행수 기자는 서울의 사립고등학교의 현직 교사입니다. 답답해하는 교사와 학생의 입장에서 학교의 진정한 자율화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도 송고하였습니다.


태그:#학교 자율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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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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