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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을 걸어보자

일주일 동안 무척 시달렸다. 행사 준비하느라 여간 신경을 썼는지 머리가 무척 무겁다. 문득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걷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도를 보니 고돌산반도 끝자락으로 바닷가를 끼고 돌아가는 해안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여수 화양면 벌구마을에서 내려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가면 힛도까지 갈 수 있을 거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물병 두 개를 배낭에 넣고 집을 나왔다. 버스를 기다렸다. 근데 먼저 온 버스가 26번 힛도행 버스다. 얼른 올라탔다. 계획은 변경되었다. 세포삼거리에서 내려 벌구마을까지 걸어볼 생각이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서너 명의 손님이 타고 있다. 신나게 들판을 달린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요동치며 달리니 아픈 머리에 멀미까지 겹쳐 어지럽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 세포(細浦)삼거리에 내려놓는다.

삼거리에 내려서자 묘한 기분이다. 조용하다. 삼거리에는 나만 혼자 서 있다. 가려는 방향은 정해졌는데, 왔던 길과 나를 내려놓은 차가 갔던 길이 서로 붙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처음으로 걸어서 여행을 떠나본다. 나는 산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있는 길도 마다하고 산으로 어렵게 타고 다닌다. 하지만 오늘은 산보다는 시원한 바다를 보면서 걸어보고 싶다.

장수리 가는 길에 세포마을 작은 슈퍼가 편의시설로 소파도 비치하고 있다.
장수리 가는 길에 세포마을작은 슈퍼가 편의시설로 소파도 비치하고 있다. ⓒ 전용호


밭에는 양파수확이 한창이다. 새참시간인가 보다. 할머니께서 손을 흔들어 주면서 반겨준다.
밭에는 양파수확이 한창이다.새참시간인가 보다. 할머니께서 손을 흔들어 주면서 반겨준다. ⓒ 전용호


21번 시도(市道)를 타고 걸어 올라간다. 낡은 슈퍼가 보이고, 밭 울타리에 쪼그리고 않은 남매로 보이는 꼬마 애들이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건너편 밭에서는 양파수확이 한창이다. 내가 사진기를 들고 여기 저기 찍고 있으니, 일하시던 할머니 한분이 '사진찍겠다고? 찍어' 하시면서 손을 흔들며 웃어주신다. 즐겁게 일하는 풍경이다.

화살표를 따라가야 게임은 계속된다

바로 고갯길을 올라간다. 하얀 건물인 보건지소를 지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도로 아래로 바다가 펼쳐진다. 늙은 부부가 햇볕아래 길가에 앉아서 방금 수확한 부추를 다듬고 있다. 나의 차림이 열심히 일하는 분들에게 미안하게 보인다. 서로 민망한 눈길을 보낸다. 마음이 무척 허전하다. 고개를 숙이고서 미안한 마음으로 얼른 지나쳐 간다.

길은 해안가를 따라 구불거리며 이어진다. 바닷바람이 상긋 불어오니 즐거운 웃음이 나온다.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어울려 잔잔하면서도 강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무겁던 머리가 가벼워진다. 한적한 도로는 차가 가끔 지나쳐 간다. 도로를 점령하고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도로변으로 줄줄이 서있는 노란바탕에 검은 화살표를 가진 도로표지판은 게임 속에 나오는 방향 표지판 같다. 화살표를 따라가야 게임이 계속된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해안도로 해안을 따라 구불거리며 돌아간다.
해안도로해안을 따라 구불거리며 돌아간다. ⓒ 전용호


도로 표지판 안전한 운전을 위해 굴곡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걸어가는 길에서 바라보면 방향표지판 처럼 느껴진다.
도로 표지판안전한 운전을 위해 굴곡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걸어가는 길에서 바라보면 방향표지판 처럼 느껴진다. ⓒ 전용호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안고 있는 장등마을

섬들로 둘러싸인 호수 같은 바다를 안고 도로를 걸어가다 보니 마을이 나온다. 장등(長燈)마을이다. 마을 아래로 해수욕장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시내버스 종점인 듯 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해변은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바닷가에 내려서니 인적이 없다.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해변은 파도만 밀려왔다가 잘게 부서진다. 부드러운 햇살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모래해변을 따라 걸어간다. 노래가 절로 나온다.

생각난다. 그 바닷가. 그대와 둘이서 쌓던 모래성. 파도가 밀리던 그 바닷가도·.··

장등마을 세포 삼거리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가니 첫 마을이 나타난다.
장등마을세포 삼거리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가니 첫 마을이 나타난다. ⓒ 전용호


장등해수욕장 한적한 바닷가 홀로 걸어가다 보면 옛추억이 생각난다.
장등해수욕장한적한 바닷가 홀로 걸어가다 보면 옛추억이 생각난다. ⓒ 전용호


되돌아가는 길보다야 낫겠지

해수욕장 위로 노란 경계블록이 이어진 도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내가 걸어오던 도로와 다시 만날 것을 예측하면서 끝까지 걸어갔다.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결정의 순간이다. 다시 돌아가야 하느냐? 해안을 따라 걸어가 보느냐?

힘들더라도 돌아가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은 생각이다. 암석지대로 이어진 해안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점점 큰 바위들이 가로 막는다. 바위를 타고 뛰어내리기를 여러 번 했건만 길은 나오지 않는다. 군사작전지역이라는 출입을 금하는 경고판에 섬뜩한 기분이 들지만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와 버렸다.

조금 더 가니 몽돌해변이 나오고 길은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풀숲을 헤치고 위로 올라섰다. 난데없는 불청객에 놀란 염소가 경계의 눈빛을 보이고 있다. 풀밭을 헤치고 나오니 하얀민들레가 반겨준다. 다시 도로와 만나니 장척(長尺)마을이다. 길 옆으로 돌담을 둘러친 집들이 정겹게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담장 너머 빈 집들도 보인다. 마을은 한적하다. 마을을 지나쳐 나온다. 노란 배추꽃들이 한들거린다.

돌담이 아름다운 수문마을

내리막길로 이어진 도로를 다시 구불거리며 걸어간다. 바다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기분이다. 혼자 조용한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가고 있으려니 마음이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다. 길 위아래로 보이는 밭에는 돌담을 둘러쳤다. 쉽게 보이지 않는 풍경이다.

수문마을 수문마을 가는 길로 버스가 올라온다.
수문마을수문마을 가는 길로 버스가 올라온다. ⓒ 전용호


수문마을 돌담 넝쿨과 어우러져 아릅답다.
수문마을 돌담넝쿨과 어우러져 아릅답다. ⓒ 전용호


수문(水門)마을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는 산일(이장)을 하는 분들로 분주하다. 마을로 올라서고 싶다.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 한 분과 마주친다. 나의 행색에 경계의 눈빛을 보인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니 "사진 찍으러 왔는갑다" 하고 대꾸한다.

밭두렁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가니 돌담길이 아름답게 이어진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돌담을 감상한다. 오랜 세월 돌담을 지키고 있는 담쟁이와 마삭줄, 등나무를 만난다. 역시 돌담은 넝쿨나무로 멋을 부려야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시골에서는 담을 보존하면 지원금을 주면 어떨까?

골목으로 이어진 돌담은 개량형 담장으로 변모했다가 다시 돌담으로 이어지곤 한다. 아마 돌담을 관리하기 힘들어서 벽돌담으로 개량했는가 보다. 내가 보기에는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집주인은 자꾸 무너지는 돌담보다는 훨씬 좋다고 느낄 것이다. 요즘은 시에서 담을 없애면 돈을 준다고도 한다. 시내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거꾸로 시골에서는 담을 보존하면 지원금을 주는 방법은 어떨까?

마을에서 내려오니 해안과 맞닿은 도로로 걸어간다. 폐교를 개량한 청소년 수련관에 서본다. 얼마 전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드라마에 바다가 보이는 학교가 나온 적이 있어 그런 기분을 느껴보려고 들어갔다.

바다를 접한 울타리 안으로 동물모형이 색이 바랜 채 무표정한 모양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렸을 적 학교에는 동물모형이 많이 있었다. 기린이라는 동물모형은 타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버둥거리며 기린을 올라타고 몸을 움직이면 그저 기분이 좋았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하얀 탱자꽃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런 시절이 다시 오지 않기를

커다란 도로표지판에는 직진하면 순천으로 간다고 알려주고 왼쪽으로 갈라서면 공정리(公亭里)로 들어선다고 알려주고 있다. 이어 자매(自梅)마을 표지판도 보인다. 마을이름이 특이하다. 공정리와 자매마을을 합해서 보통 장수리(長水里)라고 한다. 다시 삼거리에 섰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2시간 동안 걸어서인지 허리가 무척 아프다. 슈퍼 평상에 앉았다.

길가에 세워진 표지판 카페 주차장을 알리는 표지판이 바다와 어울려 아릅답기만 하다.
길가에 세워진 표지판카페 주차장을 알리는 표지판이 바다와 어울려 아릅답기만 하다. ⓒ 전용호


자매마을 농협창고 벽에 희미하게 커다란 글자가 보인다.
자매마을농협창고 벽에 희미하게 커다란 글자가 보인다. ⓒ 전용호


농협창고가 보인다. 벽면에 커다란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더듬더듬 읽어내자 엄청 무서운 표어가 보인다. 표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다. '김일성을 찢어 죽이자.' 지금은 덧칠하지 않아 글씨를 잘 알아보기는 힘들다. 서슬이 퍼런 시절, 반공을 밥 먹듯이 되 뇌이던 시절에 어느 잘난 사람이 충성서약이나 하듯 이런 글씨를 새겼는가 보다. 아름다움 마을이름과 달리 너무나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지내왔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길옆으로 커다란 트럭에는 양파를 싣는 작업이 한창이다. 노란 배추꽃 너머로 갯벌을 드러낸 바다는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름다운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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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용호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여수 쌍봉사거리에서 힛도나 백야도 가는 28번 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세포삼거리에 내려달려면 친절히 내려줄 것이다. 반대로 벌가가는 26번 버스를 타도 된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서 떠나 보는 여행도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여수 해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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