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년 전쯤 대덕연구개발특구의 2000여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들의 모임인 '연구발전협의회(약칭 연협)' 창립기념식에 간 일이 있었다. 나에게는 그 단체의 고문으로 위촉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날 초청강연이 있었는데 서울서 온 강사는 우연히도 나와 대학동기였다.  그는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로 매사에 신중하고 말도 조용조용히 하는 그런 학자 스타일의 연구원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한창 강연 중 갑자기 "우리나라 과학기술 잘 되게 하려고 노력 할 필요 없습니다. 한번 망해 봐야 되요. 그래야 과학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겁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지금 그 말의 배경과 전후 사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전혀 예측치 못했던 그의 격한 발언은 적지않은 충격으로 다가와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그 강연 후 그와 다시 얘기 나눌 기회가 없어 무슨 취지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 어떤 응어리가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킹 목사'와 '말콤 X'

 

지난 4월 4일은 1950~1960년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 지도자였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40주기 추모제가 있던 날이었다. 킹 목사는 1955년 12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여성이 버스 앞자리에 앉아 백인에게 자리양보를 하지 않은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흑인들의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끌며 일약 전국적 스타로 떠올랐다. 그리고 미국의 흑백인종차별 철폐와 흑인인권운동의 선구자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끌며 1964년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흑인인권운동의 다른 길을 걸었던 말콤 X라는 흑인지도자는 대부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아마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킹 목사와는 달리, 말콤은 흑인민족주의자로서 흑백분리운동을 벌이던 아버지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되고 어머니는 그로 인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가정사를 갖고 있다.  그런 배경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흑인 빈민가에서 처절한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었고, 백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자연스레 그의 피 속에 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흑인의 현실과 분노에 대해 절제되지 않은 언어를 쏟아내며 급진적인 흑인인권운동을 전개하였다. 

 

킹 목사는 '꿈'이 있다고 했지만, 말콤은 '악몽'을 본다고 했다. 말콤은 노예주인 백인에게 부여받은 'Little'이라는 그의 원래 성도 혈통을 알 수 없다며 'unknown'이라는 의미의 X로 바꾸었다. 

 

나는 내 친구의 그 얘기를 들으며 말콤 X가 연상되었다. 과학기술계의 말콤 X.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서야 '과학기술인 인권운동(?)'에 킹 목사 노선이든 말콤 X 노선이든 노선이라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과학기술인 해방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인 이 시점의 우리나라에서 왠지 1960년대 흑인해방운동을 상기하여 굳이 비교하자면, 대다수의 과학기술인들이 자신들의 권익과 위상이 침해당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온건한 '킹 목사파'인 데 반해 그는 '분노와 울분을 직설적으로 표출한' '말콤 X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18대 비례대표에 과학기술인 한 명도 없어

 

이번 18대 총선도 끝났다. 과학기술인들은 너나없이 비례대표에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배정되기를 고대했다.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의 전신인 대통합민주신당 모두 지난 대선 때 18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과학기술인을 30% 배정할 것을 공약했지만, 과총을 비롯한 여러 과학기술 단체는 성명을 통해 얌전하게(?) 10% 또는 20% 배정을 요구했다. 

 

과학기술인들은 지역구 출마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비례대표에 그토록 목매달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해야 국회에서 과학기술계를 대변해 줄 과학기술인이 두 명 정도는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17대 국회에서도 양당이 각 1명의 과학기술인을 비례대표로 당선시킨 일이 있다. 국회 과학기술 상임위의 위원이 20명에 이르지만 실질적으로 이 두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의해 수백만 과학기술인들이 대변되었다.

 

그러나 이번 양당의 행태에 많은 과학기술인들은 무척이나 실망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공히 각각 당시 당선의석수라고 평가되었던 25석과 12석 이내에 한명도 배정하지 않았다.  결과는 그대로였다. 과학기술계를 대변할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한명도 없는 것이다. 비율로 따지면 0%인 셈이다. 대선 때는 표를 달라며 30%를 공약하더니, 대선 끝나고 총선에 이르자 안면몰수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나라당측에서 한명의 여성이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산업계 인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대변하기엔 무리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정당의 수뇌부에 있는 분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 때 그들 스스로 공약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계파안배와 측근 챙기기로 비례대표를 오염시켰다. 과학기술계의 어떤 원로분은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명단을 보시고 흥분하셔서 전화로 이게 도대체 무슨 명단이냐고 애꿎은 나에게 질타까지 하셨다.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에서 과학기술부가 해체되는 것으로 결정 났을 때 과학기술계는 격앙되어 일치된 목소리를 냈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원로분들까지 나섰다. 한국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여러 학회들과, 서울과 대덕특구의 주요 과학기술인단체에서 반대성명이 터져 나오고, 전직 과학기술부 장관님들이 직접 인수위 요원을 만나 하소연까지 했다. 심지어는 "18대 총선에서 과학기술인의 표로 심판하겠다"는, 전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목소리도 나왔다. 

 

그래도 정치권은 오불관언, 과학기술계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제 과학기술인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이 나라와 정치권의 무관심과 푸대접에 분노를 느끼는 과학기술인이 급속히 늘어가며 '과학기술계의 말콤 X'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다. 그 피해가 결국엔 과학기술인들의 연구생산성과 나라의 과학기술경쟁력 저하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져 온 나라와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2001년 4월 과학의 날을 앞두고 내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 "생일날, 대덕의 과학기술자들 총궐기한단다"라는 글의 내용 일부가 2002년 "이공계기피현상"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단초가 되며 이공계위기 문제가 사회문제화된 지 벌써 6년이 흘렀다. 그동안 실효성 있는 타개책이라고 마련된 것이 별로 없다. 그냥 세월만 갈 뿐이다.

 

<사이언스>지의 예측을 들어보자.  "60~70년대 과학기술인 우대 및 청소년의 이공계 선망분위기가 80~9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낳았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 이공계기피현상 속에서 2010년 이후 한국의 모습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섬뜩하지 않은가?

 

축하해야 마땅할 오늘 41회 과학의 날, 이런 글을 쓰도록 만드는 현실이 한없이 안타깝다.

 

덧붙이는 글 | 여인철 기자는 한밭대 겸임교수이며 카이스트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태그:#과학의 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