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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빠, 저 라면 끓일 줄 안다요”

“진짜루?”

 

 생애 최초로 막둥이(아들, 9세)가 라면을 끓인다며 라면을 싱크대 서랍에서 꺼낸다. 물을 가스레인지에 얹고 기다린다.

 

“아빠. 물 이 정도면 되요?”

“몰라. 그 정도면 되겠지.”

 

막둥이는 처음 끓이는 거라 되게 신경 쓰이나 보다. 자꾸 물 양이 적당한지 아닌지를 물어오며 시나브로 라면 물이 끓는 것을 보고 있다. 사실 보지 않아도 불이 알아서 물을 끓여 줄 텐데 말이다. 

 

“지금 넣을까요?”

“너, 라면 끓일 줄 안다며.”

“히히히히, 누나가 끓이는 거 봤다 이거죠.”

“허허허허.그래 지금 넣어라, 넣어”

“그런데 스프는 언제 넣어요?”

“지금 같이 넣지 뭐.”

 

그렇게 스프랑 라면을 넣은 막둥이는 또 그렇게 시나브로 라면 끓는 냄비를 쳐다보고 있다. 언제 불을 꺼야 할지를 선택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게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해보지 않고서 설명만 듣거나 어깨 너머로 본 실력으로는 라면 끓이다가 불 꺼주는 타임을 맞추는 게 그리 녹록치 않을 터.

 

자꾸만 내 눈치를 보던 막둥이가 물이 끓어오르자 잽싸게 불을 꺼 버린다. 이제 된 거 아니냐며. 그러면 그렇지. 라면이 덜 익었다. 직접 먹어 보게 했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불을 켠다. 그렇게 끓인 라면을 거실 탁자위에 올린다.

 

“누나! 와서 라면 먹어. 내가 끓였어.”

 

안방에서 책을 보던 여중생 누나가 거실로 오니 맛있는 저녁 식사가 이루어진다. 막둥이는 자신이 끓인 라면이라 더 맛있는 것처럼 열심히 먹는다. 라면 먹은 후 그날따라 밥도 많이 말아 먹는다. 사실 내가 봐도 꿀맛이다. 뭐 라면이 맛이 없었던 적은 별로 없었긴 하지만 말이다.

 

 저녁에 아내가 퇴근하자 막둥이는 지네 엄마에게 인사부터 하지 않는다.

 

“엄마, 나 오늘 라면 끓였다요. 누나랑 아빠랑 맛있게 먹었어요.”

“와, 그래. 우리 아들 대단한데.”

 

 우리는 이날로 막둥이의 라면 끓이기 행각은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 다음 날 저녁이 되었다. 컴퓨터로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막둥이가 또 나를 부른다. 이번에는 나를 부른 용무가 다르다.

 

“아빠, 라면 드세요. 오늘도 제가 끓였어요.”

 

이것 참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늘 저녁도 영락없이 라면이다. 또 딸아이와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저녁을 받아먹는 횡재를 누린다. 막둥이의 과도한 ‘라면 끓이기’ 열정이 오늘도 공짜 음식을 먹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막둥이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여태까지 끓인 라면을 얻어먹기만 하다가 자기 손으로 끓이는 대로 라면요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으랴. 막둥이는 어김없이 저녁에 퇴근한 아내에게 또 한 번 ‘자랑 세리모니’를 늘어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설마 내일도 라면? 아무리 맛있는 라면도 가끔 먹어야 제 맛이지. 연달아 먹으니 별로다. 하지만 막둥이의 열정으로 봐서는 내일 저녁도 라면으로 될 거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평소 내가 밥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막둥이가 라면에 한 번 재미를 붙였으니 그럴 가능성은 십중팔구이지 않을까 싶다.

 

 그 다음날 저녁이 되었다. 막둥이가 조용하다. 웬일일까. 알고 봤더니 라면 한 박스 사놓았던 게 다 떨어졌던 게다. 휴! 다행이다. 막둥이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집에 라면이 다 떨어진 게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내가 밥을 차려 아이들과 먹을 수밖에. 이때 막둥이가 말을 한다.

 

“나, 삶은 계란 먹고 싶네.”

 

그러더니 자기가 계란도 삶을 줄 안다며 계란 6개를 냄비에 물을 담아 넣는다. 각각 2개 씩 먹으면 될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가만히 둬도 물이 잘 끓을 텐데 시종일관 냄비를 쳐다보는 센스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냄비 뚜껑이 투명하니까 계란물이 조금씩 끓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오니 막둥이는 심하게 집중을 한다. 무슨 도 닦는 사람이 ‘명상 삼매경’에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아빠. 이거 뜨거워서 못 들어요. 들어 주세요.”

“무슨 소리. 니 요리니까 니가 끝까지 책임져. 행주로 들면 되잖아.”

“아, 그렇구나.”

 

 막둥이는 삶은 계란 냄비를 가까스로 싱크대 수도에 가져다 놓고는 찬물을 받는다. 그리고 맑고 고운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른다.

 

“누나, 밥 먹어. 오늘은 내가 삶은 계란도 있어”

“야. 계란을 바로 찬물에 넣으면 안 되는 거야.”

“왜?”

“계란을 삶아서 뜨거운 물에 몇 분 두어야 계란이 제대로 익는다고 엄마가 그러셨어.”

“그래. 다음에는 그렇게 해야지.”

 

 이렇게 3일간 벌인 막둥이의 ‘요리 쇼’는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막둥이가 꽤 살림을 하는 편이다. 밥하는 것은 벌써 8살 때 익혔기에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써서 자랑한 적도 있다. 설거지는 곧잘 하고 방청소도 곧잘 한다. 빨래를 해서 느는 것은 아직 해보지 않았지만, 빨래를 걷는 것은 자주 한다. 심지어 다른 집에선 해보기 쉽지 않은 연탄불 보는 것도 가끔씩 하는 경우가 있다.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아빠의 바람대로 벌써부터 살림살이와 요리를 알아서 잘해보려는 막둥이 녀석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덧붙이는 글 | ‘더아모(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은 경기 안성 금광면 장죽리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cafe.daum.net/duamo 이며, 본인은 이곳의 목사이다. 


태그:#더아모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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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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