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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불량자에 이르는 길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다시 회복되는 과정도 오랜 시간 올바른 실천이 보장되어야 한다. 재무상담은 당장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돈 통제력을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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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몇년 전부터 재무설계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외국 사례도 연구해 왔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연금공단에서 고객들에게 제법 수준 높은 재무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연금공단은 재무상담을 포함한 노후복지 전반에 대한 지원을 목표로 담당직원들을 훈련해 왔다. 공단이 붙인 이름은 '공익적 재무설계'다.

지난해 30여 명을 뽑아 석달 동안 시범서비스를 시행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무려 500명을 뽑아 재무설계를 포함한 노후복지 상담서비스 교육을 진행했다. 강의를 하러 멀리 제천까지 갔다. 호숫가 멋진 곳이었지만, 이런 상담을 처음 하게 된 분들이라 다소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고객들이 공단에서 재무상담을 해준다고 하면 얼마나 믿을까요?"

사업이 잘될까 걱정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재무상담사의 수익모델을 생각해 보자고 했다.

상담료만 받는 집단, 상담료도 받고 상품수수료도 받는 집단, 상담료는 받지 않고 상품수수료만 받는 집단. 이렇게 세 집단이 있는데 고객들은 어떤 집단을 가장 믿을까? 당연히 상담료만 받는 집단이다. 이미 선진국에서 검증된 것이다.

재무상담 서비스 준비하는 국민연금관리공단

그러나 한국에는 아직 상담료만 받고 재무상담을 하는 집단은 없다. 몇몇 회사들이 상담료를 정액으로 받는데 그것 때문에 상담을 꺼리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공정하게 할 것으로 기대하는 고객들도 많다.

상품 수수료만 받는 집단은 뭔가 수익을 위해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상품을 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런 점에서 공단은 상품을 팔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가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이 점을 잘 활용해서 멋진 재무상담을 하자고 했다.

이렇게 공단이 국민을 대상으로 재무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참 바람직하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재무상담을 하는 사람으로서 재무상담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나와 내가 속한 포도에셋은 상담료도 받고 때로는 상품 수수료 수익도 얻는다. 그러나 원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고객들에게 돈을 다루는 힘을 갖게 함으로써 고객의 낯빛이 밝아지는 것을 느낀다.

사회구조가 건전해 질수록 개인이 행복해질 가능성은 커진다. 그러나 개인 차원에서도 돈 문제에 대한 주도성을 높여나가야 진정 행복해 질 수 있다. 재무상담은 그런 과정을 돕는다.

이런 일을 공단이 수익을 바라지 않고 해나가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다. 그래서 나는 교육에 참가한 분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싶었다. 사명감을 갖고 하시라고.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고객들의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 내부의 나태함이라고 질책하면서.

올바른 상담만 해주면 된다, 나태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기업에서 원칙을 지키면서 수익을 내려면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단 직원들은 안정된 급여를 받으면서 오로지 고객들을 위해 올바른 상담만 열심히 해주면 되니 얼마나 복된 일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좋은 조건이다 보니 대충 하려는 나태함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자고 했다.

"국민연금을 담보로 신용불량자들이 대출을 상환하게 하자는 청와대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연금 정신과 재무설계의 핵심원리를 대비시켜 보려고 최근 논란거리로 질문을 해보았다.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반대한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공단에 근무하고 재무설계 정신을 이해한 사람들이 그 의견을 표현해야 하지 않느냐고 다그쳐 보았다.

"힘이 없어서요…."

흔히 듣는 대답이다. 반론으로 얼마 전 어린이 유괴사건 담당경찰의 양심선언을 거론했다. 공단보다 윗사람 눈치를 더 봐야 하는 경찰관도 그런 의견을 내는데, 공단 직원이 못할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강의장이 조용해졌다.

어떤 차원에서건 자신의 신념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라고 주문하고 넘어갔다. 강의하러 온 거지 선동(?)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러나 이 내용은 내가 하려는 재무설계의 본뜻을 이해하는 핵심이기에 강의내용과 딱 맞아떨어지는 소재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수치로 보여주는 재무설계의 힘

 생활정보지에 실린 금융 대부업체 광고들(자료사진).
 생활정보지에 실린 금융 대부업체 광고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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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설계의 덕목 가운데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재무목표를 수치를 이용해 눈에 보이게 함으로써 스스로 그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지나치게 희생하는 건 옳지 않지만, 적절한 저축과 투자는 필요하다. 국민연금도 미래를 위한 그런 장기투자의 하나다.

그런데 미래에 받을 연금을 담보로 현재의 빚을 갚게 한다는 발상은 재무설계 철학과 정반대다. 재무설계 철학을 믿는 나와 청와대 둘 중 하나는 틀린 것이다. '둘 다 맞는 구석이 있다'는 황희정승 철학을 신봉하는 나지만, 이 대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청와대가 그런 정책을 생각한 것은 신용불량자들을 위한다는 것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들을 더 어렵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교육생들의 대답에서 정확히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정책을 펴면 가장 확실하게 이익을 보는 집단은 어디인가요?"

앞 쪽에 앉은 한 분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채권자들입니다."

연금을 담보로 빚 갚으라고 대출해 주면 채권자들은 못 받을지도 모르는 빚을 받게 되어 좋다. 채무자는 줘야 할 돈을 줬지만, 빚을 갚고 공단에서 빌린 돈도 갚아 장차 연금도 제대로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공단 관계자에게 전화로 물어본 결과 IMF 때도 시행했는데 겨우 10% 정도만이 공단 부채를 갚았다고 한다.

신용불량자에게는 개인회생·파산부터, 그리고...

그럼 어쩌자고? 청와대가 정말 신용불량자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라면 지금 법원이 시행하고 있는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국민에게 더 널리 알리는 일을 해야 한다.

그 법은 내가 아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배려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제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 업무를 해봤던 나도 가까운 친척이 그 대상자인데도 모르고 지나쳤다가 최근에야 사정을 정확히 알고 권했다. 민주노동당도 답답해 보였다. 정말 서민을 위한다면 이런 법을 더 널리 알리는 사업에 팔을 걷어붙였어야 했다. 아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법을 더 고쳐야 한다. 회생기간 5년을 3년으로 당겨야 한다. 그만큼 대상자들의 고통의 시간이 줄고 재기가 빨라진다. 또 법원 예산을 더 확보해 개인회생과 파산 절차가 지금보다 더 빨리 진행되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 절차가 늦어질수록 채무자에게는 그만큼 힘든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하지 않고 주류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도덕적 해이만을 따지는 것은 오로지 현 대출제도를 포함한 경제상황의 수혜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런 제도가 강화되면 금융사들이 더 철저히 신용을 평가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금융산업을 선진화하는 것 아닐까. 부작용도 있을 수 있으나 길게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과다채무자 '체질개선'하려면 소비지출 통제력 길러야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신용불량자를 위한 재무설계를 지원하는 것이다. 어떤 이가 신용불량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된 경우도 일부 있겠지만, 대부분은 오랫동안 소비와 지출에 대한 관리를 잘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무설계의 가장 기본인 자신의 재무좌표를 파악하는 일이다. 재무좌표가 파악되지 않고, 재무목표를 자신의 처지에 맞게 정하지 못하고 사회분위기에 휩쓸리다 무리한 투자를 하다 보면 그렇게 과다채무자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용불량자에 이르는 길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다시 회복되는 과정도 오랜 시간 올바른 실천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돕는 강력한 도구가 재무상담이다. 재무상담은 당장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돈 통제력을 높여주는 상담이다.

정말 청와대나 정치권이 신용불량자들을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그들의 재무체질을 바꿀 수 있는 재무상담 지원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당장을 위해 미래에 써야 할 돈을 앞당겨 쓰게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수익성 높은 채권 금융회사들만 유리한 정책을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난해 9월 서울 서초동 대한법률구조공단 강당에서 열린 신용불량자와의 '타운미팅'에서 대선후보이던 이명박 대통령이 신용불량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지난해 9월 서울 서초동 대한법률구조공단 강당에서 열린 신용불량자와의 '타운미팅'에서 대선후보이던 이명박 대통령이 신용불량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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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광구 기자는 (주)포도에셋에서 개인재무상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포도에셋에서 네이버 은행 코너에 정기적으로 싣는 칼럼란에도 올린 글입니다.



#국민연금#신용불량자#청와대#개인회생#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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