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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술 한 잔 들어가면 가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를 즐겨 불렀다.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아 이십대·삼십대를 추억하려는 것인가? 현실 상황의 욕구불만이 과거에 대한 애착으로 표현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얼마 전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등병의 편지>를 입영전야의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부르는 내 모습이 너무도 청승맞게 느껴져서 레퍼토리를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사십대 후반의 언덕에 올라서서 오십대를 코앞에 둔 나이에 어울리는 노래를 떠올려 보았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그런데 이런 노래는 왠지 중년의 신사에게 어울릴 법한데, 나는 스스로 중년의 사내라는 사실에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나이 마흔 여덟에!

 

나이 마흔 여덟에 마라톤 풀코스 대회를 나갔다. 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를 가장 많이 완주하는 연령층이 남자 사십대라고 하니까 내가 풀코스 신청을 한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나 역시 이미 십여 차례 풀코스를 완주했기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번 풀코스 대회만큼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참가하게 됐다.

 

작년 겨울 7년 넘게 꾸려오던 사업을 다른 회사에 넘긴 이후 애착을 갖고 매달리던 달리기도 멀리하게 됐다. 마치 길 위에서 잠시나마 길을 잃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이 달부터 새로운 일터를 찾고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무모하게도 풀코스에 재도전한 것이다.

 

6개월 동안 10㎞ 이상을 달려 보지 못한 상태에서 풀코스에 참가하려니 마치도 술·담배 즐기며 탱자탱자 놀던 제대 군인이 예비군 동원 훈련 소집 받아 장거리 행군을 눈앞에 둔 기분이 들었다.

 

16㎞ 지점, 속도를 줄이세요

 

노오란 개나리꽃 활짝 핀 4월 6일, 전등사 인근에 있는 강화공설운동장의 출발선에 섰을 땐 4시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가려 했으나, 바로 옆에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가 풍선을 달고 서 있어서 노선을 바꿨다.

 

페이스메이커를 따라서 1시간 가까이 달렸다. 옆에 대화 상대가 없이 달리기를 하다보면 끊임없이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 중얼거리게 된다. <길 위에서 혼자 중얼거리다>라는 소설 제목이 떠오른다. 달리기 할 때만큼 자기 자신과 밀착해서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길 위에서 끊임없이 혼자서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강화대교 북쪽의 해안도로에 들어서자 언덕의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언덕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천천히 달려야 한다. 내리막의 보상이 있기에 인내하며 팔을 치며 오른다. 대회 주최 측에서 설치해 놓은 16㎞ 지점 표지가 있는 곳에 나란히 붙어 있는 교통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속도를 줄이세요!"

 

교통 경고문을  보는 순간 내가 오버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더군다나 훈련도 안 된 상태에서 마음만 앞서서 밀어붙이다니. 후환이 두려워졌다. 내가 경험한 마라톤의 첫 번째 금언은 "오버하지 마라"는 것이다. 오버의 기쁨은 짧고 그 후유증은 치명적이다. 한편으론 이제 내 인생의 속도도 줄이면서 슬로우 템포로 살아야 할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민통선 앞에서

 

철조망 앞에서 자원 봉사 고등학생들이 무리지어 흥겹게 응원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이들에게도  철책선은 여전히 분단의 가시철조망일까, 아니면 낚시 금지 구역 정도를 의미하는 녹슨 경계선일까? 어느 통일 운동가가 이십여  년 전에  연설하던 내용이 떠오른다.

 

"이 지긋지긋한 분단의 철조망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지는 맙시다."

 

분단의 선이 오래되다 보니 마치도 태초부터 있던 분리선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아진 것 같다.

 

 

연미정을 지나자마자 해병대 병사들이 검문을 하는 민통선이 나타났다. 민통선을 통과하는 마라토너 한명 한명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인사를 하는 해병대 군인들에게서 따스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강화도에는 전통과 미래, 분단과 통일, 민과 군, 육지와 섬이 공존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반환점을 돌아설 때엔 4시간 페이스메이커가 지나갔고, 강화대교에서 남쪽 해안도로로 진입할 때는 4시간 15분 페이스메이커가 앞질러 갔다. 그러나 이젠 오버할 힘은커녕 따라 갈 기력도 없었다. 몸은 이미 과거의 훈련 기억을 망각한 상태였고, 준비 없는 도전은 무모한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풀코스 대회 나와서 물이나 한두 잔 마시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반환점 이후 급수대마다 들러서 바나나·방울토마토·초코파이를 먹으며 피로를 풀고 고통을 잊으려 했다.

 

하지만 먹는 것만으로는 바닥난 체력을 메울 수 없었다. 급기야 35㎞ 지점 풍경 좋은 바닷가 잔디밭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은 유혹이 밀려왔다. 그러나 낙오의 뼈아픈 상실감을 알기에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멀찌감치 앞서가는 주자들을 향해 한 발작 한 발작 걸음을 옮겼다.

 

신발끈 다시 묶으며

 

마라톤에 입문할 때 읽은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완주를 목표로 하는 마라토너라면 달리기가 너무 힘들 때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라. 눈치 보지 말고!"

 

지금까지는 부상 등의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라톤 대회에서 걷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은 생각이 바뀌었다. 완주가 목표이니 걷는 것도 완주에 도움이 된다면 당당하게 걷자. 인생의 목표도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가 처한 조건에서 열정을 다해 완주를 하는 모든 삶은 아름다운 것이리.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매고 심기일전을 했다. 그리고 노래 일발을 장전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나는 오늘은 맨 정신으로 바닷바람 맞으며 김광석의 노래를 읊조린다. 늘 푸른 꿈을 상상하며.


태그:#마라톤, #강화마라톤,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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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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