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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폐허는 얼마나 마음을 안정시키는지...반띠아이 끄데이 사원 뒷모습
 적당한 폐허는 얼마나 마음을 안정시키는지...반띠아이 끄데이 사원 뒷모습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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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달러", "언니, 예뻐요"를 외치며 물건을 파는 맨발의 아이들을 만난 것은 따 프롬 사원 돌담길 모퉁이를 돌아 한참을 걷고 난 길 끝이었다. 세계 각국의 여행객이 모여드는 앙코르에 어떻게 이토록 한적한 길이 존재할까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길이 계속 이어졌고, 그 길 끝에 거짓말처럼 비밀의 사원 입구인 듯한 문이 화들짝 나타났다.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소년, 소녀들이 눈망울을 반짝이며 모처럼 나타난 돈 많은(?) 관광객을 향해 돌진해왔다.

캄보디아를 상징하는 키워드 '킬링필드'와 '앙코르와트'. 그 캄보디아에서 의식적으로 킬링필드는 밀어내고, 앙코르와트 만을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단지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라고, 잠깐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쉴 곳을 찾아온 여행객일 뿐이라며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예의를 갖추느라 이름을 물어봤을 뿐 사흘을 동행하고도 운전사 소반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앙코르 유적만을 만나고 돌아가자 하고 내심 단호한 마음을 먹었던 터였다.

앙코르 유적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는데... 한적한 길 끝에서 만난 아이들

뚫고 앞으로 나아가기 힘겨울 만큼 관광객을 겹겹이 둘러싼 채 물건을 팔던 아이들, 팔과 다리 없는 몸을 드러낸 채 사원 벽에 기대있던 지뢰 피해자들, 애써 외면하려 해도 여행 내내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 불과 삼 년 전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 중에는 앙코르 유적 어느 곳에서도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행방에 대한 궁금증이 이는 동시에 눈에 뜨이지 않으니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 여행에 집중할 수 있어 편하다는 이기심이 섞여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 한적한 길 끝 무렵에서 이 아이들과 딱 마주친 거였다.

반띠아이 끄데이새, 내 안에서 푸드덕 날아 오르다
 반띠아이 끄데이새, 내 안에서 푸드덕 날아 오르다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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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든 새를 든 소녀는 우리에게 집요하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얼마 안 되는 달러로 이네들의 삶이 눈곱만치라도 나아진다면 기꺼이 사야 한다는 마음과 관광객들이 물건을 사주기 시작하면 학교에 가 있어야 할 아이들을 관광지로 내모는 부모들이 있어 냉정하게 외면하는 것이 진정 이들을 위하는 것이라는 두 마음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 어느 것이 진정으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인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때 선배 팬이 말했다. "그냥 사주지그래." 그것은 이 모든 상황을 간파한, 갈등에 종지부를 찍는 구원의 판결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이와 흥정을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승자는 맨발의 앙코르 소녀다. 흥정이 끝난 나무새를 정성스럽게 싸서 내게 주고는 함빡 웃는 얼굴로 돌아간다. 씨엠립 올드 마켓에서 1달러인 물건은 사원 앞 가게에서도 1달러, 맨발의 소녀들도 1달러를 받으니 사실 이 거래에서의 흥정은 재미 삼아 벌이는 아이들과의 유희인 것이다.

제 물건을 더 팔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며 나서는 아이도 없고, 내 것은 싼 것이니 값으로 치면 두 개를 사줘야 한다고 떼쓰는 아이도 없다.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정확히 네 명의 아이가 우리 일행 네 명에게 각각 물건 한 가지씩을 팔고 활짝 웃으며 행복한 얼굴로 돌아간다. 남루함에도 염치를 아는 아이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마음껏 행복해하며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 훈훈해진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행복한 '한판패'를 당하고 우리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밀림 속 비밀의 사원 안으로 깊숙이,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간다.

밀림 속에서 만난 비밀의 사원 '반띠아이 끄데이'

돌담길 끝에서 불현듯 나타난 비밀의 사원 입구
 돌담길 끝에서 불현듯 나타난 비밀의 사원 입구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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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밀림 속에서 만난 비밀의 사원은 바로 반띠아이 끄데이(Banteay Kdei) 사원이었다. "세상에!"라는 감탄사 외 다른 말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우리가 반띠아이 끄데이 사원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반띠아이 끄데이 사원이 갑자기 우리 눈앞에 나타나 준 것이다. 그것은 정녕 지혜롭고 사려 깊은 소반과 맨발의 아이들이 함께 우리에게 선사한 앙코르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늠름한 사자, 나가들이 이어진 사원 앞 테라스
 늠름한 사자, 나가들이 이어진 사원 앞 테라스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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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에 뒹구는 나가(머리가 일곱 개인 지혜의 뱀) 위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낙엽이 되고 있던 중이었다. 따 프롬 사원의 것처럼 거대하진 않지만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이 사원을 감싼 모습이 평화로움 그 자체로 다가왔다. 꼬리에 꼬리를 문 나가들의 머리 사이로 해자가 엿보인다. 거의 말라버린 그 못 물 위에 연꽃 몇 송이가 침묵 속에 피어있다.

퍼즐 맞추기. 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 책임지는 얽힘
 퍼즐 맞추기. 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 책임지는 얽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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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기둥과 밧줄에 의지한 채 위태롭게 서 있는 탑들 사이를 지나 사원의 중앙통로 안으로 들어서면 문 뒤에 문이 끝없이 반복되며 나타나 그 끝을 찾을 수가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도 여전히 그 자리인 듯 소실점이 이어지고 있다. 마치 마주한 거울 사이에 서서 거울 속을 바라보는 것처럼이나 현실 밖 풍경으로 느껴진다. 그 중앙통로를 따라 좌우 대칭을 이루어 똑같은 정원과 방들이 고리로 연결한 것처럼 다시 반복하며 자리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문 속에 문... 도대체 몇 개가 숨어있는 것일까

문 속에 문, 그 문 속에 또 문이 들어있어 끝없이 이어지는 소실점
 문 속에 문, 그 문 속에 또 문이 들어있어 끝없이 이어지는 소실점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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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몇 개나 되는 문과 방과 정원이 이 사원에 숨어 있는 것일까? 어떤 용도로 이 많은 방들과 작은 정원들을 반복하여 배치한 것일까? 바이욘 사원과 따 프롬 사원을 건립한 자야바르만 7세 때 지어졌다는 것 외에는 기록도 비문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저 짐작과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 수많은 방들은 혹여 산문을 걸어 잠근 채 결사정진에 임하는 문경 봉암사 선방 같은 선승들의 수행처는 아니었을까 짐작도 해본다. 얼굴 가득 웃음을 짓는 순박하고 유순한 사람들이니 방 한 칸에 틀어박혀 한철 정진하고 나면 큰 깨달음을 얻지 않았을까? (다른 안내서에는 이곳이 앙코르 왕조 당시 법정이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한때 야생 사슴 떼가 살고 있어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웠을 때 말고는 비교적 최근까지 승려들이 거주해 온 덕분에 상당부분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구조가 따 프롬 사원과 비슷하다 하니, 거목의 뿌리들이 돌 사이를 파고들면서 사원을 감싸지 않았더라면 따 프롬 사원에서도 이러한 끝없는 반복됨과 소실점을 느끼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 프롬 사원에 있던 악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럼에도 살아 남는것이 무릇 생명을 가진 자들의 의무인가?
 따 프롬 사원에 있던 악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럼에도 살아 남는것이 무릇 생명을 가진 자들의 의무인가?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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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어나오니 황색 가사를 두른 부처의 뒷모습이 보인다. 다른 여행객들과 달리 우리는 사원의 뒤편인 서문에서 시작해 중앙통로를 관통한 후 사원 정문인 동문으로 나온 것이다. 사원 정면 테라스가 한눈에 조망되는 나무 아래 앉으니 이 사원 공간의 배치에 대해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된다. 낙엽 밟는 소리, 목탁소리와 함께 악사들의 연주 소리가 들린다.

우리 일행 외에는 단 한 명의 관객도 더 없건만 악사들은 묵묵히 연주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번 여행 때처럼 한국인이 지나가면 아리랑을, 일본인이 지나가면 일본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폐허가 주는 편안함, 사원 분위기에 적당하게 어울리는 민속 음악이 흐르고 있다.

지갑을 열어 그들의 연주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대부분이 팔다리가 없는 불편한 몸으로 연주하고 있다. 여행객이 그리 많지 않은 이 사원에서는 아직 그들이 연주할 공간이 주어지는 모양이다.

반띠아이 끄데이 정문 앞으로 나오니, 오랜 기다림으로 목이 조금 길어진 소반의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우리에게 반띠아이 끄데이 사원을 선물한 지혜로운 소반, 정말 고마워요.


태그:#반띠아이 끄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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