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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하루 일정을 묻는 소반에게 '오늘 하루는 온전히 앙코르와트를 위한, 앙코르와트 데이'라고 답하니, 나머지 시간들은 어찌 보낼 거냐고 되묻기에 떠오른 곳이 따 께우(Ta Keo) 사원이었다.

바이욘(Bayon) 사원의 엄청난 규모와 위용, 따 프롬(Ta Prohm) 사원의 천년 세월, 반띠아이 쓰레이(Banteay Srey) 사원의 섬세하고 미려한 조각까지 물리도록 탐한 뒤니, 단순함으로 인해 오히려 힘이 느껴진다는 따 께우 사원에서 잠깐 시간을 보낸 뒤, 오후에 앙코르와트를 만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무, 돌담, 숲 그리고 한적한 오솔길
 나무, 돌담, 숲 그리고 한적한 오솔길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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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따 께우를 찾아 나선 길, 차창에 몇 방울 물기가 맺힌 것이 눈에 띈다. 구름이 두텁게 내려앉긴 했지만 바야흐로 계절은 1월말, 비 올 확률 0%에 가깝다는 건기에 정말 빗방울이 맞나 싶어 창 밖으로 눈을 돌리니 한적한 돌담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비록 다섯 방울 뿐이었지만 건기에 만난 빗방울이 반갑다.

적당히 허물어진 담장이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과 어우러져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 돌담길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자리잡는다.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길 저쪽 끝을 확인하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이렇게 자꾸 한눈을 팔다가는 앙코르와트를 위해 일부러 비워둔 날, 앙코르와트 근처에도 못간 채 하루가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치나, 얼른 밀쳐내고 따 께우를 향해 달린다.

 열대의 가을,  마른 낙엽과 짙은 녹음
 열대의 가을, 마른 낙엽과 짙은 녹음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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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 께우에서 제일 먼저 나를 맞는 것은 하늘 끝까지 닿을 듯 수직으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다. 다른 사원들에서는 건물의 화려함에 가려 가장 나중에 보였던 숲이 이곳에서는 먼저 보이고, 그 안에 따 께우가 당당하게 앉아 있다. 짙은 숲 속에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바튼 기침소리를 낸다.

나무 끝은 아직도 창창한 녹음인데, 그 푸르름을 이탈해야만 하는 건기의 마른 낙엽들이 애처롭다. 좀처럼 사원 안으로 들지 못하고 한참을 숲 속에서 서성이다 머리가 일곱 개인 나가를 만나 아는 척을 한다. 지혜의 화신으로 이곳에 널려 있음에도 뱀에 대한 편견 때문에 좀처럼 친해질 수가 없다.

숲을 한참 돌아, 아직 복원되지 않아 위태로워 보이는 동문 계단으로 뛰어올라 사원 안으로 들어간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돌덩이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본다. 저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다른 사원들과는 달리 따 께우는 한 점의 조각도 없이 미완인 채로 남아있는데, 아마도 몽골의 침입으로 공사 도중 중단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할 뿐이다.

 미완성으로 외부에 조각이 돼 있지 않아 남성적 힘이 느껴지는 따 께우 사원
 미완성으로 외부에 조각이 돼 있지 않아 남성적 힘이 느껴지는 따 께우 사원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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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끝까지 닿을듯 이어진 오솔길
 숲 끝까지 닿을듯 이어진 오솔길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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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한 점 없이 돌을 툭, 툭, 쌓아놓은 사원 모습이 낯설어, 첫눈에는 뭔가 밋밋한 듯 허전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본디부터 돌이 가졌던 날것의 생명력으로 인해 점점 힘과 웅장함이 느껴지니 경이롭기만 하다. 다른 사원에서는 섬세하고 미려한 조각 하나 하나에 취해 가끔씩 전체를 놓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이곳에서는 사원 전체가 주변의 숲과 어우러져 크게 한 뭉텅이로 눈에 들어와 시원함이 이를 데 없다.

가파른 계단을 엉금엉금 기어올라 중앙탑 성소에 이르니 사방으로 트인 숲 끝에서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그 까마득한 숲 끝에 실핏줄처럼이나 가늘고 하얀 오솔길이 이어져 있다. 신들의 도시 앙코르에 온 후 처음으로 사원에서 향을 사르고 눈을 감는다. 끊임없이 일고 스러지는 집착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갈구한다. 옆에서 친구 팬이 따 께우를 세운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신을 향해 향에 불을 붙이고 참배한다. 언제나 한결같은 내 이기적 갈구가, 그 옆에서 잠시 부끄러워진다.

 따로 또 같이...
 따로 또 같이...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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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성소 바깥벽에 기대앉아 무심한 풍경들을 가슴에 담는다. 그 무심함이 내게 조금씩 전이된다. 치마 입은 소녀가 가파른 계단을 나비처럼 폴짝 폴짝 한걸음에 뛰어 올라온다. 코끼리와 압사라, 앙코르를 상징하는 청동 주물들을 든 소녀의 손을 보고 나는 얼른 가방 속의 코끼리와 거북이를 손에 잡는다. 소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원달러를 외치면, 이미 다른 곳에서 샀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내보일 요량으로…. 소녀는 나를 지나친 채 통통 튀는 걸음으로 중앙 성소의 제 엄마에게 그 물건들을 내민다. 아직 가방 속에 든 내 손이 부끄러워 사탕 한 개를 꺼내 소녀에게 내민다.

신들의 도시 앙코르 유적 어딜 가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감탄이다. 내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 완벽함 뿐이라 그저 감탄할 뿐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내 마음대로 빈 벽에 상상으로 조각까지 해본다. 압사라를 불러내어 춤을 추게 하고, 관세음보살을 새겨 넣고, 작은 꽃을 조각한 후 마지막으로 이 사원을 세운 사람들을 그리고 나니, 내 마음 속 따 께우가 비로소 완성된다.

 엉금엉금 기어올라가는 가파른 따께우 계단
 엉금엉금 기어올라가는 가파른 따께우 계단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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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발가락 몇 개를 가렸을 뿐인 슬리퍼를 신은 청년 하나가 가파른 계단 위에서 서성이다 신발을 벗어 저 아래 바닥으로 힘껏 던지더니 맨발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간다. 슬리퍼를 신을까 말까로 아침 내내 고민하다 결국은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나선 친구 J가 낮게 감탄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끊임없는 내 안의 편견과 갈등도 저렇게 단번에 내던져 버리고 나면 그만인 것을, 왜 스스로 지어놓은 것을 놓지 못해 이렇게 부대끼며 살고 있는지…. 잠시 마음이 편안해진다.

 씨엠립 사람들. 기다림의 미학을 아는 소반과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일하고 있는 유적 관리인 처녀
 씨엠립 사람들. 기다림의 미학을 아는 소반과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일하고 있는 유적 관리인 처녀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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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이나 우리를 기다린 소반이 '내 그럴 줄 알았지'하는 표정으로 해먹에 누운 채로 빙글빙글 웃으며 반갑게 맞아 준다. 소반과는 반띠아이 끄데이 사원 남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따 께우 오는 길에 만났던 아름다운 돌담길을 걷기로 한다. 그저께 따 프롬 사원 안에서 한나절을 보내면서도 아름다운 담장의 존재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따 프롬 돌담길, 씨엠립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
 따 프롬 돌담길, 씨엠립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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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발가락 사이로 황토 먼지가 살살 들어온다. 허물어진 돌무더기들 사이로 보이는 따 프롬 사원 안은 온통 나무 뿐이다. 그 때다. 트럭의 짐칸에 가득 탄 씨엠립 사람들이 일제히 얼굴을 내밀어 손을 흔들더니 쌩하니 지나간다. 마치 그들이 여행자이고 내가 이곳 씨엠립 사람인 듯하다. 지나가던 뚝뚝 기사들이 되돌아와서 목적지를 묻는다. 약간 뻐기듯이 '노 땡큐'라고 말하고, 돌과 나무로 바닥이 울퉁불퉁한 돌담길을 계속 걷는다.

따 프롬 안의 거대한 나무 뿌리가 담장을 휘감고 길 밖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사원 벽 무희들이 담장 밖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돌담 틈에서 생을 다한 마른 풀잎이 바람에 사각거린다. 어제 만났던 새들의 지저귐도 정답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길 끝 모퉁이에 소반의 모습이 보인다.

 따 프롬 교차로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소반
 따 프롬 교차로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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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장소가 아니기에 의아하게 물으니 소반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모퉁이를 돌면 돌담길이 계속 이어지고, 그 돌담길을 30분쯤 주욱 걸어가면 호수가 나오는데, 그 호수 왼쪽에 미국식 레스토랑이 많으니 점심을 먹고 있으면 자신이 찾아오겠다는 거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30분, 과연 오늘 안에 앙코르와트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것이 좀 의문스러워진다. 모든 걸 잠시 접고, 돌담길 모퉁이를 돌아서 인적 없는 오솔길을 다시 타박타박 걷기 시작한다.

덧붙이는 글 | 1월말 다녀왔습니다. 일부 사진은 fen의 동의를 얻어 사용했습니다.



#따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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