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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나무꽃. 알싸하고도 향긋한 점순이의 품 같은 꽃이다.
▲ 생강나무꽃. 알싸하고도 향긋한 점순이의 품 같은 꽃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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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뿌렸으나 나무들의 외양은 아직 겨울과 다르지 않다. 산자락에 푸른 기운이 돌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잡목숲 사이로 노란 꽃이 피었다. 생강나무꽃이다. 가지를 꺾으면 생강냄새가 난다고 하여 생강나무가 되었다. 맛은 따듯하고 떫다.

생강나무꽃 핀 곳에 함부로 가지 마라, 뭔 일 난다

생강나무는 녹나무과의 갈잎작은큰키나무이며 정선 지역에서 꽃을 가장 먼저 피우는 귀한 꽃손님이다. 비슷한 꽃으로는 산수유가 있지만 꽃이 지닌 품위는 생강나무가 몇 수 위다. 대체적으로 산수유는 일부러 조성한 것들이라 집 근처나 가로수로 사용되고, 생강나무는 산에서만 자란다.

가로수로 식재한 산수유도 꽃을 피웠지만 아무래도 생강나무 꽃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산수유나무의 껍질은 회갈색빛이 나며 보풀이 일어나는 반면 생강나무 껍질은 물푸레 나무처럼 두껍고 강하다. 열매도 산수유는 길쭉 하지만 생강나무는 콩알처럼 생겼다.

꽃은 생강나무가 선이 굵고 향기가 짙지만 산수유는 꽃술이 가늘고 흩어진 느낌을 준다. 나무잎은 산수유가 나무 잎맥이 선명하며 날씬한 하트 모양이고, 생강나무는 색이 짙으며 인간의 심장 모양을 닮았다.

산수유 열매는 약재와 차로 끓여먹지만, 생강나무 열매는 기름을 짜 불을 밝히기 위해 등잔기름으로 쓰거나 여인네들과 멋쟁이들의 머리기름으로 사용했다. 산촌에서는 이 마저도 귀해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아우라지 처녀 "뱃사공 아저씨, 싸리골 총각 좀 만나게 해줘요"

동박꽃. 나무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기름을 짠다.
▲ 동박꽃. 나무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기름을 짠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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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촌에서는 산수유보다 생강나무가 더 친근하다. 봄꽃이 귀한 동네라 꽃이 피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봄바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든다. 그래서인가 생강나무꽃과 관련된 사랑이야기도 많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님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 정선아라리 가사 중에서

우리나라 아리랑의 시원으로 평가 받고 있는 정선아라리의 대표적인 가사이다. 정선에 있는 아우라지가 만들어낸 우리의 사랑이야기이며 100년 전쯤의 일이다.

아우라지는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에서 흐른 물이 골지천으로 흐르고, 골지천이 송천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두 물줄기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하여 '아우라지'가 되었다.

가사가 만들어진 연유를 들여다보자. 북면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유천리의 싸리골에 살고 있는 총각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우라지가 있고,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했다.

아우라지. 정선아라리 가사를 탄생 시킨 정선아우라지. 처녀총각의 애닯은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 아우라지. 정선아라리 가사를 탄생 시킨 정선아우라지. 처녀총각의 애닯은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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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사이에 두고 애닯은 사랑을 나누는 처녀와 총각 그리고 올동박

두 사람이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는 총각이 살고 있는 마을인 싸리골의 동박나무숲. 때는 동박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던 만추의 계절이었다. 동박나무는 생강나무의 또 다른 말이다. 이 지역에서는 올동박 또는 동백나무, 산동백나무라고도 부른다.

처녀와 총각이 만나기로 한 날 배를 띄울 수 없을 정도로 강물이 불어 있었다. 처녀와 총각은 아우라지를 사이에 두고 애를 태웠다. 처녀가 뱃사공에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며 배 좀 건네 달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싸리골에 있는 올동박을 따러 가야한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동박꽃이 피어나던 봄부터 열매가 익어가는 가을까지 두 사람의 사랑은 눈물 겨웠다. 뱃사공이라고 처녀의 애닯은 심정을 모를까. 그러나 뱃사공으로서도 폭우로 불어난 물을 감당하긴 어려웠다.

"에구, 사랑이 뭔지…. 내일 쯤이면 배를 띄울 수 있으니 기다리게. 하룻밤만에 동박이 다 떨어지지는 않을 거여."

뱃사공이 처녀를 위로해 보지만 연정에 불탄 청춘남녀에겐 소용이 없었다. 처녀가 그렇게 노래하자 싸리골 총각이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님그리워 나는 못살겠네'라고 노래를 이어 받았다. 불어난 물이 야속하기는 총각도 마찬가지. 처녀와 총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처녀와 총각의 눈물 바람을 지켜보는 것도 가슴 아픈 일, 당시 뱃사공이었던 지장구(지유성) 아저씨가 처녀총각의 애절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리워진 노래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생강나무를 매개로 한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아릿해진다.

생강나무에서 핀 꽃 가만히 냄새를 맡고 있으면 정신이 어뜩해진다.
▲ 생강나무에서 핀 꽃 가만히 냄새를 맡고 있으면 정신이 어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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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순이 따라 동백꽃 숲으로 들어간 '나'의 그 아득한 경험

생강나무에 얽힌 사연은 또 있다. 강원도 춘천에서 작품활동을 하다 29세에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의 작품 <동백꽃>이 그것이다. 소설 내용을 살펴보자.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느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그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아래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위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 김유정 단편소설 <동백꽃> 중에서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 되는 김유정의 소설은 질박하다.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은 남쪽 지방에서 만날 수 있는 붉은꽃을 피우는 동백이 아닌 생강나무를 말한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와 '점순이'는 닭으로 인해 티격태격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점순이가 이성에 눈을 뜬 것은 먼저인 듯싶다. 점순이가 '나'에게 관심을 나타내지만 '나'는 아직 그럴 마음이 없다.

점순이와 '나'와의 사랑은 동백꽃 숲에서 완성되었다

김유정 초상.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소설가 김유정. 춘천 실레마을에 그를 기리는 문학촌이 있다.
▲ 김유정 초상.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소설가 김유정. 춘천 실레마을에 그를 기리는 문학촌이 있다.
ⓒ 김유정문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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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점순이가 자신의 닭과 '나'의 닭을 싸움시켜 놓고 청승맞게 호드기를 불고 있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갔던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지게 작대기로 점순네 닭을 때려 죽인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닭을 죽인 후부터 일어나는 상황이다.

점순이 '나'에게 닭이 죽은 것에 대해 눈감아 준다고 한다. 안심이 되는 순간 점순이 '나'의 어깨를 짚은 채 쓰러졌고, 둘은 한창 흐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혔다. 그리곤 화면은 생강나무꽃으로 클로즈업된다.

이들의 사랑은 격정적이진 않다. 풋풋한 풋사과 같은 사랑이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처녀와 총각이 하룻밤의 사랑이 아닌 하루 낮의 꿈결 같은 사랑을 생강나무꽃이 흐드러진 곳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인 '나'는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라고 그 순간의 혼곤함을 표현한다.

사랑이 끝나고 점순이 '나'에게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하고, '나'는 그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요즘 사람들과 사랑하는 법이 다르다. 순수하고 에둘러 가는 이들의 사랑법이 그래서 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생강나무꽃은 사랑꽃이자 연애의 꽃이다. 봄 기운이 겨드랑이를 파고 드는 날 생강나무꽃을 따러 산으로 오르는 여인의 뒤태엔 봄바람이 가득 들었다. 따라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순간이다.

그런 이유로 생강나무꽃이 만들어내는 우리네 사랑이야기는 애절하거나 해학적이다. 단숨에 끝나버리는 휘황한 네온사인같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봄날 생강나무꽃이 피어있는 산자락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그윽하게 감고 소설속 주인공인 '나'가 되어 '점순이'의 '알싸하고도 향긋한' 향을 기억하다가 결국 한낮임에도 '땅이 꺼지는 듯 정신이 아찔해'지는 황홀함을 경험한다.

비에 젖은 동박꽃. 생강나무 꽃과 함께 물방울꽃이 피었다.
▲ 비에 젖은 동박꽃. 생강나무 꽃과 함께 물방울꽃이 피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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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4월25일부터 27일까지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에서는 '제6회 김유정문학제'를 개최한다. 여러 문화 행사가 준비되며, 소설속 주인공인 '점순이'를 찾는다고 한다. 대상은 미혼여성.



#아우라지#정선아라리#김유정#동백꽃#생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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